중국에는 신 중국 창건에 공헌한 ‘10대 개국 원수(开国元帅)’가 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인 ‘10대 원수’의 초상화는 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주더(朱德) 1886-1976
스촨(四川) 출신으로 중국 최고의 군사 지도자로 꼽힌다.
1927년 저우언라이(周恩来), 허룽(贺龙) 등과 함께 난창봉기(南昌起义)를 일으켰으며 1930년 총사령관이 됐다. 항일전쟁 초기 군사를 이끌고 타이항산(太行山) 전선에서 싸웠으며 1940년 옌안(延安)으로 들어간 후 주로 마오저둥(毛泽东)을 도와 전반적인 군사 지휘를 맡았다.
신 중국 창건 후 국가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5년 ‘10대 원수(十大元帅)’ 중 첫번째 자리에 올랐다.
1976년 베이징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2.펑더화이(彭德怀) 1898-1974
군사적 지위가 주더에 버금가는 인물로 제1야전군의 대표이기도 하다. 언제나 전선 최전방에서 적을 물리쳤으며 이러한 군사업적은 다른 사람들이 견줄 수 없는 부분이다.
그의 사랑 또한 순탄치 못해, 첫사랑이었던 사촌 여동생은 그가 결혼하려 찾아갈 무렵 지주(地主)의 핍박에 못 이겨 자결하고 말았고 그 후 저우(周) 씨 성의 여인과 결혼 했으나 이마저도 전쟁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다. 서로 생사도 모른채 헤어져있다가 그녀가 다시 펑을 찾아왔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로 딸까지 낳아 살고 있었던 터라 조용히 돌려보낸다. 그 후 만난 부인과는 평생을 함께 했다.
1974년 ‘문화대혁명’ 때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3.린뱌오(林彪) 1906-1971
지휘능력과 전적이 뛰어난 인물로 꼽힌다. 중요한 전역을 지휘, 승리로 이끌기도 했으며 해방 후 중난군사지역(中南军区)사령관,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 부장 등 직을 맡았다.
1971년 정권을 장악하려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몽골로 도망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 그는 공산주의를 배반한 반동주의자로 비판받아 왔으나 2007년 그의 초상화가 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전시되며 사실상 명예를 회복했다.
4.류보청(刘伯承) 1892-1986
중국 인민해방군 주요지휘관 중 한 명으로 일생동안 수많은 전쟁을 지휘했으며 부상만 아홉군데나 입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여했으며, 북양군벌에 반대하는 호국(护国)•호법(护法) 전쟁에 참여했다가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다. 치료 시 뇌신경에 손상을 입히지 않기 위해 마취약 사용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82년 연령과 건강을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1984년 베이징에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허룽(贺龙) 1896-1969
후난성(湖南省) 출신으로 21명 청년을 이끌고 식칼을 잡고 경찰서를 야습, 총 12자루를 빼앗아 농민운동을 조직한 일화가 있다.
1926년 북벌에 참가하고 1927년에는 난창(南昌)봉기에 참가했으며 1934년 홍군 제2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장정에 참가했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체육위원회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에 원수가 되었다. 문화대혁명에 의해 실각된 뒤 병으로 죽었으나 1975년 10월에 명예를 회복했다.
6.천이(陈毅) 1901-1972
1930~40년대에 중국공산군의 사령관이었으며, 1958~66년 외교부장을 지냈다.
천이는 대장정(长征)에 참여하지 않고 남부에 남아서 게릴라 활동을 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부대는 중국 중부의 공산군 주력부대인 신사군(新四军)에 통합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쯔강 하류에서 싸웠다.
상하이의 초대 시장이기도 하며 1958년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시기 공격을 받아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1972년 베이징에서 71세에 사망했다.
7.뤄룽환(罗荣桓) 1902-1963
그는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의 정치위원으로 근무, 지역 주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을 펼쳐 1948년 만주에서 린뱌오가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승리는 전세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작용을 했으며 이로부터 1년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55년 원수 계급을 부여 받았고 1963년 지병으로 61세에 베이징에서 세상떴다. 10대 원수 가운데서 가장 일찍, 가장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원수이다.
8.쉬샹쳰(徐向前) 1901-1990
어려서부터 집안형편이 어려워 글을 많이 읽지 못했다. 1923년 황푸군관학교(黄埔军校)에 입학, 일찍 손중산(孙中山)의 호위대원으로 손중산과 숭칭링(宋庆龄)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장졔스(蒋介石)가 “별볼일 없다”고 여기던 쉬샹쳰는 훗날 장의 국민당 군대 수만, 수십만을 섬멸하게 된다.
1990년 쉬샹쳰은 유골을 자신이 싸워왔던 산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9. 녜룽전(聂荣臻) 1899-1992
항일전쟁 초기 팔로군 제115사단 부사단장을 맡아 린뱌오와 함께 핑싱관(平型关)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1955년 총사령관으로 승진, 1956년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고 그 후 국가과학위원회•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겸임하면서 현대과학기술 연구활동을 주관하여 중•장거리 유도탄, 원자폭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 파란만장한 인생여정을 끝내고 향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0. 예젠잉(叶剑英) 1897-1986
문화대혁명과 그 후에도 별탈 없이 지위를 보존하며 정치생애를 이어왔다. 대장정 기간 향후 진로를 놓고 의견대립이 생긴 장궈타오와 마오쩌둥 가운데서 마오쩌둥을 지지, 원래 장의 부하였으나 마오쩌둥을 살해하려는 장의 음모를 까밝혔다. 이 일로 마오쩌둥의 칭송을 받았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비바람을 피해 갈수 있었다.
마오쩌둥 서거 후 ‘4인방’의 체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여 문화대혁명의 청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82년까지 당의 부주석자리를 맡았고, 1985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박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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