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사랑했던 예술가 창슈홍(常书鸿)은 1904년 절강(浙江)성 항저우(杭州)의 만주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시 나라를 구한 애국자로서 그를 절강(浙江) 공업 학교에 보내 공부를 하게 했지만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끝끝내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염직을 전공한다. 또 그는 미술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미술 교사로 지낸다.
그러던 1927년 여름, 그는 운 좋게 프랑스 파리로 가는 한 증기선의 허드렛꾼으로 들어가 파리에 도착한다. 파리에 도착한 후 그는 모든 시간을 프랑스어 공부와 미술 공부에 할애한다. 그 결과 국비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리옹(Lyon)국립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전 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소묘대회에서 중국의 조그마한 청년이 1등을 거머쥔 것이다. 1932년 그의 작품이 파리의 고등 미술 대학원에서 인정받으면서 이로 인해 파리 미술가 협회 회원으로 선출된다. 또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유화(油画) 작품들은 현재 프랑스 국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파리에서 10년의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그는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청년 창슈홍(常书鸿)은 항상 조국을 그리워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예와 좋은 생활 조건, 작업환경을 갖췄지만 항상 마음이 공허했다. 항상 조국을 그리워하던 그는 1935년 가을 어느 날, 파리의 한 오래된 서점에서 우연히 ‘둔황(敦煌)도감’이라는 화집을 발견한다. 화집은 총 6권으로 400장이 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중국에 아직도 이러한 예술의 보고가 있다는 것에 놀라며 좋은 생활 조건과 작업환경을 모두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그는 둔황막고굴(敦煌莫高窟) 보호를 위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그렇게 그 꿈에 한발자국씩 다가서고 있었다.
고국에 돌아온 뒤, 그는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 예술과 둔황막고굴 보호에 대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닫혀있는 의식을 깨우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둔황 예술을 알리기 위해 ‘벽화 살리기 운동’과 대형 전시회를 열어 둔황막고굴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 역설했고 화집도 출판했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 문화 예술 전람회를 열고 인도와 미얀마로 넘어가 중국 문화 예술을 알리는 등 이러한 활동을 계속 하였다. 또 1950년부터 1990년까지 꾸준히 일본을 방문해 관련 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일본에서 중국인 최초로 '인간국보' 칭호를 받았다. 1981년, 그 당시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邓小平) 또한 그의 업적을 높이 샀다고 한다.
중국 문화 예술과 둔황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작품활동을 쉬지 않았다. 1934년 '중국예술가학회'를 창립하며 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유명한 예술가 왕린이(王临乙), 뤼스바이(吕斯百), 리우카이취(刘开渠), 천즈시우(陈之秀), 왕즈윈(王子云), 여빙리에(余炳烈)와 함께 활동한다. 이 때 발표한 ‘화장(梳妆)’, ‘병든 부인(病妇)’, ‘발가벗은 여인(裸女)’과 정물화 ‘포도(葡萄)’등의 작품은 프랑스 살롱전에도 출품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중에 1934년에 리옹(Lyon) 청춘 살롱전에 출품해 미술가 학회 금상을 받은 발가벗은 여인(裸女)은 그 가치를 인정 받아 현재 리옹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또한 그의 다른 작품 ‘샤나(Shana)초상화(沙娜画像)’는 현재 파리 근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상태이다. 창슈홍, (常书鸿). 그는 중국인 최초로 프랑스 국제 살롱전에서 3번의 금상, 2번의 은상, 1번의 영예상을 수여 받은 영예로운 예술가이다.
창슈홍(常书鸿)은 자신의 한 평생을 둔황(敦煌) 예술과 중국 문화 예술에 바쳤다. 부인과의 이혼과 자식을 잃는 등의 큰 슬픔을 겪었지만 이는 그의 작품에 대한 열망과 그의 숭고한 예술 정신을 꺾을 만큼 강렬하지는 못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간직될 것이다.
▷복단대 학생기자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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