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노동절(劳动节) 경축행사는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부 혁명 지식인사들은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한커우(汉口) 등지에서 ‘5.1절’을 소개하는 전단지를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1920년 5월1일 ‘신청년(新青年)’ 7권6호 ‘노동절기념호(劳动节纪念号)’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 혁명가이자 교육자)의 ‘노동신성(劳工神圣)’, 쑨중산(孙中山)의 ‘천하위공(天下为公: 온 세상은 일반 국민이 공유하는 것이다)’ 및 리따자오(李大钊: 중국 공산당 창시자)의 ‘5.1 운동사’, 천두시우(陈独秀: 사상가, 정치가)의 ‘상하이허우성방직공장 후난여공문제(上海厚生纱厂湖南女工问题)’ 등의 문장이 실려있다. 또한 ‘여법화공공회요강(旅法华工工会简章)’ 및 탕산(唐山), 산시(山西), 창장(长江) 등지의 노동현황 조사내용이 실렸다.
5월 1일,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지우장(九江), 탕산 등 공업도시의 노동자들은 도심 한복판에서 대대적인 가두시위와 집회를 열었다.
리따자오는 ‘신청년’에서 ‘5.1 운동사’를 발표하며, 5.1절의 내력과 미국, 프랑스 등 국가의 ‘5.1’절 노동절 기념행사를 소개하고 중국 노동자들은 ‘5.1’을 각성의 날로 삼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천두시우도 ‘5.1절’을 기념하기 위해 ‘상하이허우성방직공장 후난여공문제’의 문장을 통해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진상을 폭로했다. 천두수이는 상하이선박창고공계(上海船务栈房工界)와 연합해 ‘노동자의 각성’이라는 연설을 통해 ‘노동창조세계’, ‘노동자가 가장 유용하고, 가장 귀중하다’는 관점을 피력했다. 이날 각 지역의 근로자와 지식인사들은 함께 집회를 가졌다. 상하이에서는 천두수이의 지휘 하에 5000여 명의 근로자들이 모여 중화전국노종계 등 7개 단체가 공동으로 세계노동기념대회를 열었다. 이곳에서 천두수이는 준비대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기념회에서는 각계 대표들이 연설을 발표하고, 근로자들은 8시간 근무,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이라는 ‘삼팔제(三八制)’를 요구하며, ‘노동만세(劳工万岁)’, ‘중화공계만세(中华工界万岁)’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신청년’은 또한 상하이, 베이징, 텐진, 우한 등 10여 도시 근로자의 현황을 조사한 보고서를 기재했다.
베이징에서는 리따자오의 주도 하에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기념활동을 펼쳤다.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이날 수업을 거부하고, ‘베이징대학 학생주간’은 ‘노동기념호’를 출판했다. 학교 내부에서는 500여 명의 학교직공과 학생들이 기념대회를 열고, 리따자오는 연설을 했다. 허멍쉬옹(何孟雄) 등 8명의 베이징대 학생과 일부 청년들이 ‘5월1일 베이징 노동자선언(五月一日北京劳工宣言)’을 발표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착취를 반대하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하라고 선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덩중샤(邓中夏)는 베이징 장신덴(长辛店)에서
철도 노동자들에게 ‘5월1일 베이징 노동자선언’ 전단지를 돌리며 강연했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5.1’ 국제노동절 기념 활동이자, 중국 역사상 최초의 5.1 ‘노동절’로 기록된다.
▷이종실 기자
국제 노동절의 의미
노동절은 1989년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 대회’에서 1890년의 5월 1을 정식으로 국제 노동절로 정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따로 있었다. 1886년 5월 1일, 미국의 35만 노동자는 노동시간 8시간 쟁취를 위해 시위했다. 5월 3일, 경찰이 헤이마켓에서 2명의 시민을 총으로 사살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해졌고, 4일 경찰 7명이 시민이 던진 폭탄에 사망했으며, 노동자 4명이 경찰에 의해 총살됐다. 이 사건과 판결이 국제 노동절의 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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