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清明)’의 사전적 의미는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의미다. 청명절은 동지[冬至] 후 100일 되는 날로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을 뜻한다.
중국 문학사에서 청명절(清明节)과 관련된 고대시가는 매우 풍부하고 다채롭다. 중국의 역대 유명 시인들은 대부분 ‘청명시가(清明诗词)’를 남겼는데, 죽은 자를 추모하는 비애의 시도 있지만, 대부분은 활기차고 즐겁게 묘사되었다. 청명절이면 온화한 날씨에 초목이 소생해 성묘하러 나온 김에 따사로운 봄빛에서 다채로운 놀이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당대 시인 왕유(王维)의 ‘한식성동즉사(寒食城东即事)’에서는 청명절에 사람들이 외부에서 공차기, 그네타기를 하는 활기찬 모습을 묘사했다. 송대 시인 영유(柳永)도 ‘목란화만(木兰花慢)’이란 시에서 청명절에 활기차고, 음악은 흥을 돋우며, 풀밭을 거니며 노는 모습을 묘사했다.
청명절과 한식절(寒食节)의 관계
청명절을 논하자면 지금은 사라진 ‘한식절’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한다. 한식절은 춘추시대 진나라(晋国)의 개자추(介子推)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진문공(晋文公)의 망명 시절, 충신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문공의 허기를 채웠다. 이후 문공은 국군(国君)으로 등극하나, 군신들에게 토지와 작위를 하사할 때 충신 개자추를 잊었다.
크게 실망한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진산(绵山)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후에 진문공은 친히 개자추를 찾아 진산으로 오나, 개자추는 관직을 바라지 않는다며 산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러 개자추가 모습을 드러내길 원하지만, 정작 개자추는 노모를 끌어안고 산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된다.
이후 충신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이날은 불로 밥을 짓지 않고, 찬 음식을 먹게 되어 ‘한식절’이라 칭했다.
청명절기는 한식의 3번째 날에 해당된다. 시간이 흐르며 차츰 한식의 풍습이 청명에 스며들었다. 송대 이후에는 한식일에 성묘하는 습관이 청명절로 옮겨졌고, 답청(踏青) 봄놀이, 그네뛰기 등의 풍속도 청명시기에 이루어 졌다. 청명절의 단순한 농업절기는 주요 기일로 의미가 확대되었고, 한식절의 영향은 차츰 소멸되었다. 그러나 한식일에 찬음식을 먹는 풍습은 청명절 속에 면면히 이어져왔다.
엄밀한 의미에서 청명절과 한식절의 풍습은 뚜렷한 공통점이 없다. 다만, 시간이 근접하고, 고인을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정서가 비슷하다. 이로 인해 청명절이 한식절을 대신하게 되었다.
고대 청명절은 ‘미식절(美食节)’이자 ‘여인절(女人节)’
‘미식절’이라 함은 따사로운 봄날 꽃들이 만개하면서 맛좋은 음식들이 시장에 나오고, 한식절의 특색있는 음식들이 전승된 데 기인한다.
고대 여인들은 평소 얼굴을 드러내고 외출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청명절이면 여인들은 정성껏 외모를 치장하고 바깥으로 나와 제사를 지내고, 답청을 즐겼다. 이로 인해 ‘여인의 청명, 남자의 해(女人的清明,男人的年)’라는 말이 나왔다.
신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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