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in 상하이] 윤리적 민감성 깨우기

[2021-09-14, 16:36:50] 상하이저널

예전에 큰아이가 2학년 때 동네에 동갑내기 친구네 가족이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상해에 살 게 되었다. 나는 중국어 한마디도 못 하고 낯선 환경을 힘들어하는 그 가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며 도왔고, 아이들은 절친한 친구로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잘 지냈다. 그러다 4학년이 되었을까 어느 시기에 중국 학교에 다니던 친구 한 명이 같은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그때 우리 동네엔 한국 가족들이 많이 없을 때라 같은 학년 여자친구가 딱 세 명이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스쿨버스에 짝없이 혼자 앉아 귀가하는 아이를 보게 되었고, 두 친구만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같이 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룹 미술 수업을 한 가정씩 돌아가며 하는 날엔 끝나고 간식도 먹고 한참을 신나게 논 다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우리 집에서 하게 되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줄행랑을 치듯 돌아가 버렸다. 그럴 때 아이는 세상 잃은 표정이었지만 딱히 나에게 뭐라 얘기하진 않았다.

 

“간식을 준비했으니 먹고 가자.”

“엄마에게 다 끝났다고 전화해 줄까?”

 

나는 서둘러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도 내 말조차 듣는 척하지 않았다. 나를 따랐던 친구 엄마는 우리 아이와 내가 자신의 아이와 자신에게 고마운 사람이지만, 새 친구가 더 세고 그 엄마가 나보다 더 세니 자기와 아이가 어떡하겠냐고 했다. 그 무렵 아이들에게 친구와 노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텐데, 필요할 땐 받고 필요가 없어졌을 땐 ‘쎈’이라는 모호한 말을 뱉어놓는 얄팍한 입술이라니….

 

마침 아파트 임대 계약 기간도 다 되어 그 동네를 떠나 좀 더 넓은 동네로 이사를 나왔다. 큰아이는 친구들이 많은 동네에서 잘 적응해 지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발령을 받아 상해를 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친구 둘은 일찌감치 갈라섰다는 이야기 또한 들려왔다. 씁쓸해하는 엄마와 달리 아이는 친구와 송별회를 해야 한다며 잘 놀고 헤어졌다. 


얼마 전 탈레반은 아프간을 장악하고 무력공포정치를 다시 시작했다. 우리 정부는 대한민국의 활동을 도운 협력자 가족들 391명의 생명을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우방국 간의 긴밀한 협력 속에 극적으로 구해 돌아왔다. 정의롭고 지극히 도의적 책임을 다한 이 ‘미라클 작전’을 두고 칭찬도 많았지만, 자국민이나 잘 챙기라며 욕설을 쓴 댓글도 보였다. 의리를 지켜 타국민의 생명까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국가간의 신뢰도도 높은 나라의 국민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일상의 궤도에서 윤리에 근거한 법과 규율들을 지키고, 강제성을 띄진 않지만 스스로 가늠해야 하는 은하계에 뿌려진 행성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윤리적 상황을 만난다. 때로는 옳게 지켜지고, 때로는 행성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세상엔 선한 영향력도 많지만, 꼭 한 꼭지 비틀어 말하는 사람부터 심지어는 명분도 없이 목숨을 잔혹하게 앗아가는 무리까지 성찰이 없고, 한계 없는 악도 만연하다. 그러니 나부터 생각하고 행함에 주의를 기울이고,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스스로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 게으름, 자기합리화, 자기연민, 자신이 가진 사회적 권력을 떨치고 일어나 들여다보고 내면의 거울을 닦는다면 양심을 비추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격이 더 성장하고, 혼돈 없이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이타적인 존재가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줌마 이야기> 코너가 올해부터 <허스토리 in 상하이>로 바뀌었습니다. 다섯 명의 필진들이 상하이 살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여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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