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 열림원 | 2019.06.27 |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우선 책 속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이따금 나는 당신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이 나 같다. 생활력 강하고, 이웃을 잘 깔보는 아낙은 내 어머니 같고, 추문과 질투, 경쟁과 온정 속에서 반목과 친목을 되풀이하는 동네 사람들은 꼭 우리 고향 어른들 같다. 아이들, 청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일단 소설에 등장한 이상 종이 위에서 꾸준히 맥박 소리를 내며 사람답게 군다. 제 역할이 크든 작든, 교양이 많건 적건, 활달하게. ‘생활’을 업신여기지 않는 이들의 건강함으로. 혹은 ‘생활’에 묶인 자들의 비루함으로. 수고롭고, 부끄럽게.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허영을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恶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는 체할 뻔하기도 한다. 이들의 절뚝거림이 이들의 불편이자 경쾌轻快다. 그 엇박 안에서 어떤 흠欠은 정겹고 어떤 선善은 언짢아, 당신의 인물들은 이윽고 한번 더 사람다워진다. (중략) 나는 선생의 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비치는 저 불합리한 합리, 핏기 어린 모순을 애정한다.
‘말言 주변에서 말 찾기’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박완서 선생의 <닮은 방들>이라는 단편 속 인물들에 대해 쓴 글인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문장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산문집에는 이렇게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이 산문집에는 김애란 작가가 처음 펴낸 산문집으로 2005년부터 근 15년간 모은 길고 짧은 산문 32편이 들어있다. 어린 시절의 빛 바랜 추억 한줌도 있고, 선배 작가의 수상식에 쓴 축사도 있고, 소설 창작노트도 있고, 여행기도 있고, 서평 비슷한 글들도 있고,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막막한 심경을 담은 글들도 있다. 가끔은 소소하고 가끔은 무거운 글들이지만 매 한편의 글마다에 김애란 작가 특유의 감성과 내밀한 시선과 은근한 코믹함이 담겨 있다.
이 산문집을 통해 우선, 김애란 작가의 엄마는 손칼국수집을 경영해서 딸 셋을 키웠구나, 쌍둥이 자매였구나, 어려서는 피아노를 배웠고 대학교 때에는 잠깐 판소리도 배웠지만 음치였구나, 시누이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결혼도 했구나 등등 네이버 검색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깨알 정보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 독서는 꼭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하고, 모든 가치와 신뢰가 기울어진 현실 앞에서 김애란 또한 말의 무력함과 말의 무의미와 싸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던 부분도 없지 않다. 글 속에 등장하는 ‘손 잡고 자취방 순례를 했다는 그 연인’이 남편이 되었을까 하는 지엽적인 관심은 나만의 속물적 본성일까?
책 소개가 슬슬 탕개가 풀리고 길을 잃어가는 것 같다. 여하튼 김애란 작가의 문장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김애란 글의 체취가 그리울 때 비타민처럼 한두 편씩 읽을 수 있는 산문집인 것 같아서 추천드린다. 김애란의 책에는 독자를 위로하고 행복해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으니까.
류란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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