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디즈니 만화에는 한국 공주가 없을까?”
한 한국계 미국인 소녀가 품은 의문은 뮤지컬 ‘심청’으로 만들어졌고, 그녀가 디즈니 주제가 풍으로 만든 노래는 SNS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솔직히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스스로 희생한다는 심청의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라고 절규한 김승희 시인의 시를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나도 미국 사회의 구성원인데 왜 나와 같은 아이의 이야기는 없어?”라는 ‘문제의식’, 미국 사회 속 이방인의 정서를 디즈니라는 주류 문화 코드로 녹여냈다는 그녀의 ‘영리함’이다. 어쨌든 그녀의 전략은 적중해서 CNN과 FOX 등 유명 매체에서 조명을 받고 LG 제품 광고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결과 할리우드 등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녀처럼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모두가 그런 행운을 갖지는 않는다. 몇 년 전 로버트 드니로가 뉴욕대 예술대학 졸업식에서 “여러분은 이제 X됐다”고 일갈한 유명한 연설을 기억한다. “여러분 앞에 이제 평생 겪게 될 ‘거절의 문’이 열리는 것”이라고 축사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자기는 여러 작품에서 오디션도 없이 캐스팅될 것 같지만, 사실은 오디션에 가서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를 반복하는 일상이라고 고백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커리어를 쌓아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치열하게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요즘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예화들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를 계기로 공채는 대부분 사라졌다. 젊은이들이 바라는 좋은 일자리의 숫자는 ‘인서울’대학생 수와 일치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이마저도 이미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최근 미•중 무역 갈등으로 미국에서 제정한 반도체 법과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이 미국에 최대규모의 투자를 약속한 동맹국인 한국의 등에 비수를 꽂는 조치라고 다들 야단이다. 수출이 대폭 감소하면서 무역적자가 커지고 환율이 치솟는 상황 속에서, 상당수의 사람은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는 오지 않더라도, 더 이상 안전한 캐쉬카우를 만들 수 있겠는지 걱정이 많다. 한동안 창업 투자 열풍과 코딩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나 그마저도 싸늘하게 식고 ‘네카라쿠배’의 신화도 주가 폭락과 함께 덩달아 빛을 잃고 있는 분위기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고용시장을 마주하고 있는 청년들을 보면서 한숨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생각해보면 아침마다 “잘살아 보세” 새마을 운동 노래를 들으며 등교하고, 80년대 과외 금지 시절을 거쳐 대학에 가고, 고속 성장 시대에 사회에 진출한 나와 내 바로 위 세대는 고용 면에서만큼은 가장 행운의 세대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7, 80년대 ‘한강의 기적’ 이면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압축성장을 견인했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영화 <미싱타는 사람들>
1970년대 평화시장에는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공부 대신 미싱을 타며 ‘시다’ 또는 ‘공순이’로 불린 소녀들이 있었다. 저마다 가슴에 부푼 꿈을 품고 향했던 노동교실에서 소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를 하고, 희망을 키웠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청춘이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온 편지.
올 초 개봉한 영화<미싱 타는 여자들> 얘기다. 우리 아이들은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나?
특성화고 학생들이 실습 시간에 죽거나 다치고 있다. 어린 배달원들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도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해 치료비는커녕 오토바이를 물어내야 한다. 정규직 채용은 갈수록 어렵고 비정규직에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불리한 노동계약 조건 때문에 호소할 데가 없다. 어렵게 들어간 정규직 직장에서도 어떤 불이익이나 임금 체불, 산재 문제, 부당해고, 직장 내 괴롭힘 등의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기가 어렵다.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청춘들이 직업적인 능력뿐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까지도 배울 수 있는 교육과정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미래 교육 수요와 사회 변화를 반영”해야 하고, “미래 핵심역량”을 키우겠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서 “노동인권 교육”이 빠진 것은 그래서 우려스럽다. 지식노동자가 될 우리 아이들을 포함해서 여전히 오늘날 경제 활동 인구의 70%는 노동자이고, 그 나머지도 노동자의 가족이거나 친구이기 때문이다.
오는 11월 12일 상하이 공감영화제에서 <미싱 타는 여자들>을 상영한다. 우리 엄마, 누나, 언니, 이모들의 이야기다. 비록 힘들고 어려웠지만 빛나는 청춘을 눈부시게 살아낸 삶의 기록이다. 배고픔을 모르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지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여전히 삶의 무게 앞에 좌절과 고통을 겪는 오늘의 청춘들을 격려하는 응원의 편지가 될 것이다.
김건영
-맞춤형 성장교육 <생각과 미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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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아이들과 책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쓴다. 청소년들을 위한 진로 코칭과 상담을 병행하고 있다. 청소년 인문캠프, 어머니 대상 글쓰기 특강 등 지역 사회 활동을 해왔으며, 도서 나눔을 위한 위챗 사랑방 <책벼룩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상하이저널과 공동으로 청소년들의 진로탐색을 위한 프로젝트 <청미탐>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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