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in 상하이] 학도암에서 보낸 새해 첫날

[2023-01-06, 15:44:24] 상하이저널
2023년의 새해 첫날은 한국에서 맞았다. 중국이 위드 코로나를 시행하자마자 아이들 학교는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교사부터 학생들까지 순식간에 확진자들이 늘어났다. 집에 구비해 놓은 자가진단키트도 응급약도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불안감은 커졌다. 아이들 학교가 온라인 수업을 결정하자마자, 우리는 바로 짐을 싸 한국으로 왔다. 겨울방학 동안 한국방문을 계획하고 있던 차라 그 일정이 조금 당겨진 것이기는 했지만, 피난 아닌 피난이 된 셈이다.

우리 아이들이 새해 첫날을 한국에서 맞은 경우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 같다.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서 줄곧 해외 생활을 하다 보니, 새해 1월 1일은 겨울 방학 전이었기에 한국에서 보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 1월 1일은 좀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12월 31일이 되면 전국의 유명 사찰 한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새해 첫날을 맞았다. 한번 두 번 반복이 되다 보니 어느덧 우리 가족의 특별한 연례행사가 되었다. 12월 31일 밤,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만 가득한 산사의 절. 아랫목이 뜨끈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했던 방 한 칸에서 5명이 옹기종기 앉아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다짐을 나눴다. 

지금 돌아보면 그 추억이 꽤 그럴싸하지만 어릴 때는 그 시간이 멋쩍기도 하고 지겹기도 했다. 절보다도 가족들보다도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이 더 즐거운 나이였으니. 그래도 스님과 함께 마셨던 소나무잎 차향이 아직 생생하고, 1월 1일 새벽 눈을 떴을 때 밤새 내린 함박눈으로 순백색이 된 땅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보며 설렜던 마음도 떠오른다.

부모님은 여전히 1월 1일이 되면 절에 가신다. 이제는 부모님도 연세가 드셔서 멀리 있는 절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지는 않으시고, 평소 다니시던 절에서 정갈하게 새해 첫날을 보내신다. 드디어 올해 우리 아이들도 이 연례행사에 동참할 기회가 왔다. 언제나처럼 휴일 아침에는 늦잠 자려는 아이들과 실랑이하며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했지만. 부모님은 평소 두 분만 호젓하게 다니시다가 새해 첫날에 중국서 온 손녀들과 동행하시니 자동차 뒷자리가 묵직해진 만큼 기분도 즐거워 보이셨다.


부모님이 평소 다니시는 절은 불암산 중턱에 있는 학도암이라는 작은 절이다. 그나마 1월 1일이라 절을 찾은 신도들이 있기는 했지만, 조용한 편이었다. 절에서 내려다보는 전경도 근사했고,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아 그대로 쌓여있는 풍경도 운치 있었다.

법당에 들어간 아이들은 어색해 보이기는 했지만 눈치껏 절도 따라 하고 기도도 했다. 사실 법당이란 곳이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도 그 공기를 느꼈으리라. 새해의 계획과 다짐을 마음속에 담지 않았을까.

점심 공양은 떡국이었다. 떡국 한 그릇과 김치가 다인 간소한 공양이었지만, 모두가 한 그릇씩 싹싹 비웠다. 자기가 사용한 그릇은 셀프 설거지라는 공양간 규칙에 따라 아이들은 찬물에 손을 넣고 그릇을 씻었다. 그러다 보니 설거지 담당인 줄 알고 그 옆에 빈 그릇을 놓고 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이들은 자꾸 늘어나는 그릇을 외면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설거지했다. 집에서도 안 하는 설거지를, 그것도 오로지 찬물만 나오는 곳에서. 친정엄마는 아이들 안쓰럽다고 그만 시키라고 내게 계속 눈치를 주셨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보겠나 싶기도 했다. 새해에 누군가가 사용한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이 설거지가 참 의미 있는 봉사활동이 아닌가 싶었다.

이날 아이들은 주지 스님과 레몬차를 마시면서 차만큼 향기로운 인생에 대한 지혜도 듣는 영광도 누렸다. 주지 스님 역시 중국에서 영어와 중국어와 한국어를 다 구사하는 우리 아이들이 기특하고 신기하다며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해 주고 싶어 하셨다.

새해 첫날, 절에서 느낀 공기는 유달리 시원하고 달큰했다. 그 공기처럼 2023년에는 모두가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졌으면 한다.

레몬버베나(littlepo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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