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상하이 205] 소설가의 귓속말

[2023-08-19, 07:33:11] 상하이저널
이승우 | 은행나무 | 2020년 3월
이승우 | 은행나무 | 2020년 3월
최근 들어 읽었던 책을 여러 번 읽는 습관이 생겼다. 읽은 책을 또 읽는 것에 신간을 읽는 것만큼의 설레임과 호기심은 없지 몸에 꼭 맞는 오래된 옷을 입는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다. 이승우의 산문집 <소설가의 귓속말>이 나에게는 그런 책 중의 한 권이다.  

1981년에 등단하여 40여 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이승우는 한국에서는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리는 중견작가다. 또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로 일컬어지는 르 클레지오(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부터 "한국에서 노벨문학 수상자가 나온다면 이승우 작가가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받을 만큼 국내 외로 작품성을 인정받지만 2021 년에야 드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승우 작가의 문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역시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는데, 첫인상 이 '뭐지? 무슨 이런 고급진 말장난을?'이었다. 바로 '집요하게 의미를 탐색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장'으로 평가되는 이승우 특유의 문체 때문이다. 그 뒤로 이승우의 일부 단편과 장편을 찾아 읽으면 서 그 문체에 슬슬 중독되어 가게 되었다. 문체는 작가에게는 문신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 산문집에도 에누리 없이 이런 문체가 노출 된다. 이를테면 아래의 문장과 같다.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는 개는, 물지도 않고 쫓아 오지도 않는데도 왜 두려운가. 물 수 있고 쫓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개는 무는 동물이 아니라 물 수도 있는 동물이다. 물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하는데, 어떨 때 물고 언제 물고 어떻게 무는 모르기 때문에 대비할 수 없다. 그 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알 수 없다 것이다. 물 수 있고 쫓아올 수 있는 것들은 물지 않고 쫓아오지도 않을 때도 무섭다. 사납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위협 앞에서 몸은 저절로 움츠러 들고 뻣뻣해진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 어떤 짓을 언제 어떻게 왜 할지 모르는 사람은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찾아 있는 개와 같다. 무서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소설가의 귓속말 8 쪽/웅크리고 앉은 큰 개와 내가 빠진 웅덩이> 

다리가 세 개인 강아지는 정체를 숨기고 다리가 네 개인 강아지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살도록 종용된다. 다리가 네 개인 강아지의 보폭과 속도와 리듬을 따를 수 없음에도 그 보폭도 속도와 리듬을 따라 하고, 따를 수 있는 것처럼 하고, 따르는 체해야 한 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품의 온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체한다. 살을 맞대고 비비고 끌어안을 때의 느낌을 모르면서 아는 체 한다. 느끼지 않고는 이해가 안 되는 영역의 일들을 느끼지 않았으면서 이해한 체 한다. 느끼지 않고는 이해 가 안 되는 영역의 일들을 느끼지 않았으면서 이해한 체한다. (중략) 사랑을 받는다는 자각 없이 사랑을 받는 체하고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하는 체한다. 시늉이 삶이 된다. 
<소설가의 귓속말 22 쪽/ '-체 하기'와 혼잣말>  

26 편의 산문들 속에 이런 문장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런 문장들에 "뭐야?"라는 거부감이 아니라  "뭐지?"하는 호기심이 작동하시는 분들에게는 이 책을 자신있게 추천한다. 통증 포인트와 치유 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있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자극과 위로를 두루 받을 수 있는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류란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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