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 지냈던 지인에게 친구 차단을 당했다. 누구보다 의미 있고 강렬한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이라 믿기지 않았다. 한참 후 전해 듣게 된 그 이유는 더 충격적이었다. 내가 외도하고 있다는 심증으로 인연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함께 들은 남편과 아이들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남편은 고민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한동안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 하루 종일 하염없이 걸었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쉬어갈 겸 카페 문을 열었다. 제법 찬 공기를 맞으며 걷다 따뜻한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 몸도 마음도 노곤해졌다. 작은 테이블 앞에 놓인 동그란 가죽 의자에 앉아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창가에 홀로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이 눈에 띈다. 거리가 좀 있긴 해도 나와 마주 보는 형국이라 노골적으로 바라보면 실례가 될 것 같다.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펼쳐 보는 척하며 여인을 흘깃 훔쳐본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인은 창밖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둬들이고,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 전체를 볼 수는 없지만, 여인의 꽉 다문 입매가 몹시 고혹적이다.
혹여 눈이 마주칠까 얼른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장아이링의 산문집은 번역 상태가 엉망이라 문장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치파오를 입고 살짝 턱을 치켜든 얼굴이 낯익다. 읽고 있던 책 표지에 있는 여인과 같은 얼굴. 홍차 한 잔을 시키며 카페 주인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카페가 있는 건물이 장아이링이 1939년부터 1947년까지 살았던 창더꽁위(常德公寓)라고 한다. 장아이링의 얼굴을 다시 바라본다. 첫 원고료를 받아 백화점에 립스틱을 사러 갔다던 그녀의 도도한 표정은 창가에 혼자 앉아있는 여인과 묘하게 닮았다.
“그녀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스타킹의 올이 나간 후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이 종아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 같은 실패의 예감이 그녀를 감쌌다.”
(장아이링 <색,계> 중)
여인이 떠나려는 모양이다. 일어서려다 주춤하고 서서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2분이 채 안 되어, 여인은 작은 손가방을 챙겨 황급히 카페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상대를 유혹하되 의심받지 않기 위해 늘 경계해야 했던 여인, 결국 사랑 앞에 무너져 목숨마저 던지며 경계를 무너뜨린 여인. 여인이 떠난 자리에는 립스틱이 묻은 커피 잔과 그녀가 던진 질문만 남았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은 사랑일까.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사랑할까.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의심의 씨앗을 건네받은 그는 과연 내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여인의 고민이 곧 내 고민이었다. 연인이 매국노가 아니고 내가 스파이가 아니라 해도,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확신에서는 점점 더 멀어진다. 사랑하기에 경계에 서서 오늘도 한없이 흔들린다.
윤소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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