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사랑법 12] 손끝만 닿아도 저릿하다면_ 화카이해상생태공원

[2024-04-23, 18:14:09] 상하이저널
[사진=화카이해상생태공원(花开海上生态园)]
[사진=화카이해상생태공원(花开海上生态园)]
봄은 문득 오는 것이 아니라, 번지듯 천천히 스민다. 화카이해상생태공원(花开海上生态园)에 들어서자, 나를 반긴 건 온몸을 녹신하게 하는 햇살 아래 저마다의 빛으로 공기 중에 번지고 있는 꽃들이었다. 어린 처녀의 잔머리처럼 잔뜩 흐트러진 나뭇가지가 분홍빛을 뿜어낸다. 봄꽃들은 화산 폭발처럼 강력하게 빛을 분출하면서, 동시에 꿈결처럼 몽롱하다. 파스텔로 그림을 그린 뒤 손가락으로 쓱 문지른 것처럼.

봄빛에 눈이 시렸다. 여린 풀과 나뭇잎의 연둣빛,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때문에 어지러웠다. 잔뜩 찡그리고 눈을 반쯤 뜬 채 바라보니, 봄빛이 더욱 번졌다. 일렁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나무 그림자들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아직 멀리 있는 해가 숨어 있는 나를 슬쩍 건드렸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헐거워진 흙을 꾹꾹 눌러 밟았다. 퍼석퍼석 메말라 들뜬 내 마음을 지르밟듯이.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발밑에서 부서졌다. 유난히 길고 매섭던 겨울을 견디느라 텅 비어버린 잎들은 부서질 때 경쾌한 소리를 냈다. 옆에 있던 그가 시선을 발끝에만 두고 있는 내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느슨하게 쥔 손이 가만하고 따스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손등에 봄바람이 닿았을 뿐인데, 가슴이 저릿했다.

“얼굴만 떠올려도, 이름만 떠올려도, 그 어깨만, 그 손길만, 그 뒷모습만, 하여간 그 향기만 떠올려도 가슴에 전기 먹은 송사리 같은 슬픔이 느껴지지 않거든 사랑 아닌 줄 알아라. 사랑하면 슬프다. 진정으로 슬퍼진다.” 
(류근 <진지하면 반칙이다> 중)


공원에 2월에 피는 꽃, 3월, 4월, 5월…에 피는 꽃을 고루 심은 까닭은 모두가 활짝 핀 꽃만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피지 않을 때는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긴다. 사랑하는 사람은 활짝 핀 꽃뿐 아니라, 앞으로 필 꽃이나 이미 진 꽃도 아낀다. 꼭 다문 꽃봉오리에서 앞으로 만개할 꽃의 미래를 본다. 꽃이 떨어져 밟히고 짓이겨져 흙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때 환했던 꽃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빛을 기억하는 이는 마른 가지에서도 꽃을 본다. 꽃의 성취나 효용이 아니라, 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짧게 스친 손길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의 필 꽃과 핀 꽃, 그리고 이미 진 꽃을 동시에 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만개한 꽃들 사이에서 혼자만 야물게 꽃망울을 오므린 채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여전히 무슨 꽃을 피울지 알지 못한 채, 팽팽하게 차오르며 가만히 기다리는 꽃.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이미 수많은 봄을 그냥 보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아직 피지 못한 꽃을 바라본다. 그것도 넋을 잃고 황홀하다는 듯이.

꽃이 만발했을 때, 곁에서 웃어주는 일은 쉽다.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반복되는 실패나 연이은 불운으로 남몰래 눈물 흘릴 때 곁에 있어 주는 건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손끝만 닿아도 저릿하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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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위챗: @m istydio, 브런치스토리 @yoonsohee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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