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에서 무국적자로 살아온 '한국인'의 눈물겨운 목소리
요녕성 무순에 ‘짱무쟝(장목수)’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솜씨도 좋고 마음씨가 착해 정직하다고 평판이 나있지만 그는 간첩죄로 14년간 중국에서 감옥생활을 했었고 지금까지 무국적으로 중국에서 생활해오고 있는 ‘한국인’이다. 그의 이름은 장근주(77), 1951년 한국군에 입대, 그 해 특명을 받고 중국으로 침입하다가 나포되어 14년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였으며 현재까지 중국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다.
**▩ 한국군에 입대 중국에서 체포
고향이 평안북도 강서군인 장씨는 1950년 살길을 찾아 남포로 이주하였으며 남북전쟁시기인 1951년 7월에 아버지, 동생과 함께 황해도 초도라는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장씨는 한국군 징병소식을 접하고 아버지와 동생을 남으로 향하는 군함에 태우고 자신은 한국군에 입대해 군부대를 따라 평안북도 회도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미 극동공군사령부 소속부대인 호염부대이며 분대장이 김기하라는 것을 소개받았다. 회도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은 그는 특명을 받고 5명으로 구성된 특수임무팀에 가담해 중국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1년 9월 13일, 일행 5명은 단동영해에서 중국변방군에 발견돼 나포되었다.
**▩ 외국인으로 중국 거주
나포된 장씨는 요녕성고급인민법원으로부터 간첩죄로 15년 판결받고 무순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감옥에서 장씨는 중국어를 배우고 목수일을 하게 되었다.
1965년 무순감옥은 1년을 감형, 장씨를 석방했다. 출옥 후 장씨는 귀국을 요구, 중국정부에서 여러 외교채널을 통해 노력했으나 그때는 중한 수교 전이라 귀국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무순감옥 산하 무순기계공장에 장씨를 배치해 근무하게 하였으며 1984년에는 외국인 임시거주증을 발급해 지금까지 무순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 중국정부에 감동의 눈물
기자가 장씨를 만났을 때 그는 신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젊은 시절 건장한 체구였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왜소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힘들게 파란곡절 생애를 말하면서 “중국정부가 너무 고맙다. 감옥에서 전신이 마비돼 생명이 위급한 시기에 최선의 구호로 살아나게 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중국정부에서 불편 없는 생활을 하게끔 도와주었다. 심지어 1992년에 퇴직했는데 지금까지 퇴직금을 주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1967년에 조선족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아직까지 신분증이 없는 탓에 가까운 가족여행 한번 못했으며 더욱이 자신의 특수신분 때문에 자식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아버지로서 정말 괴로웠다면서 “국적 없는 인간의 슬픔은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 한국정부 야속하다
1992년 중한 수교 후 장근주씨는 지인과 한국에 있는 동생을 통해 수차 한국국방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돌아온 회답은 장씨가 근무했던 부대가 미군부대였던만큼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씨는 “청춘을 한국에 바쳤건만 한국정부는 너무나 무성의하다. 신장암으로 나는 생명마감고비에서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제라도 국적이 회복된다면 죽어서 혼이라도 한국에 갈수 있을 텐데… 한국정부에서 나의 민원을 해결해주길 기다릴 뿐이다”라고 힘겹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