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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이야기] 단풍 숲 오솔길

[2020-01-31, 06:20:00] 상하이저널
작년 끝 무렵 김환기 화백의 ‘우주’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100억을 넘어섰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작가라 소식이 반가웠다. 나의 아버지는 김환기 화백과 동향이시다. 그 시대가 그런 화풍을 좋아했는지 초등 교사셨던 아버지의 작품도 비구상 계열의 작품들이다. 1남 3녀 중 둘째였지만 가장 먼저 결혼했다. 아버지께 결혼 선물로 아버지의 국전 입상작인 ‘바다’를 달라 했다. 둘째딸의 요구가 당돌했을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기꺼이 그림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신혼여행에서 돌아 와 지금까지 중국에 살다 보니 아버지의 선물은 시댁 거실에 걸려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반장인 내게 담임선생님은 학년 초 학급 환경미화를 위해 가로가 긴 종이를 주시며 아버지께 부탁해 그림을 그려오라 말하셨다. 나도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는 줄 몰랐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아셨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30대 초반에 초등 교사를 그만두시고 시골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다 화재로 빚을 안게 되어 5년 째 술로 폐인처럼 사는 아버지에게 그림을 그려오라는 선생님의 부탁은 내겐 큰 부담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림을 그려? 라는 생각부터 붓 하나, 물감 하나 없는데 어떻게 그 큰 종이를 채워가나 막막하기만 했다. 

딱히 나도 대안이 없어 정신이 맑으실 때 종이를 내밀며 선생님의 말을 전했다. 아버지도 집에 마땅한 미술도구가 없는 걸 아시는지 갑자기 크레파스를 가져오라셨다. 크레파스라니 절망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쓰다 남은 크레파스로 종이를 울긋불긋 채워가셨다. 1시간여 지난 후 내 눈을 의심했다. 단풍이 물든 나무로 가득 찬 숲이 내 앞에 있었고 그 숲에 조그만 오솔길 하나가 보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 전에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자랑스럽게 선생님께 그림을 드렸더니 1학년 5반 교실에 액자로 만들어 걸어 주셨다.

이듬해 아버지는 네 자녀가 눈에 밟혀 다시 임용고시를 치르고 교사로 복직하셨고 숲 속에 낸 자신의 오솔길을 찾으셨다. 그림을 그리면 굶는다시며 자녀들이 그림을 가까이 하는 걸 싫어하셨다. 모두 전문직종에 종사하지만 각자 취미로 그림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유전의 힘을 보게 된다. 넷 중에서 미술 실력이 가장 부족하지만 좋은 작품을 보면 기분이 좋고 힐링이 되어 결혼 전에 혼자 전시회를 찾곤 했다. 

상하이는 다행히도 나의 자녀들을 데리고 갈만한 전시회가 늘 있어서 행복하다. 엑스포 중국관이 미술 전시회장으로 바뀌며 아이들과 세 번이나 갔다. 아이들 모두 취향이 다르지만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저 좋다. 작년 홍췐루에서 가장 가까운 미술관에서 한국 단색화전이 열렸었다. 김환기 화백이 사랑한 파랑색 작품부터 처음으로 보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까지 감동 그 자체였다. 미술책 속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큰 호수의 작품들을 직접 보며 미처 보지 못하던 부분들까지 생생하게 보았다. 더불어 병원에 계신 친정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보았으면….

아버지는 그 좋은 재주를 퇴직 이후에 좀 살리셨으면 좋으련만 몇 작품 미완성의 그림만 그리시다가 말았다. 문득 아버지가 그려 준 ‘단풍 숲 오솔길’을 찾아 올 생각을 못한 나를 탓한다. 세월이 너무 흘러 이젠 찾지 못할거란 생각이 드니 슬프다. 아버지가 주신 ‘바다’ 그림으로 만족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우주’ 소식을 들으며 올해가 가기 전 한국에 갈 기회가 생기면 그래도 모교를 방문해 보리라, 1학년 5반 교실을 가보리라 싶다. 40년이 지난 지금 ‘단풍 숲 오솔길’이 걸려 있는 기적이 있기를, 아버지께 당신의 그림을 보여줄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Renny(denre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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