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분단 70주년]
역사를 읽으면 미래가 보인다핍박과 억압에도 꺼지지 않은 조선의 魂
영국의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은 국가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는 명언을 남겼다.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고 10년이 흐른 지금, 해외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떤 의미일까?
상하이저널 고등부 학생기자단이 광복·분단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전후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몸바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일제강점기 사건탐구②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조선인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제국주의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만약 이 점을 간과한다면 이 사건은 단순히 일본 역사에서 참혹한 이야기의 하나로서, 또는 가련한 조선인의 비극으로서 기껏해야 동정의 눈물을 사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문제를 절대 비껴갈 수 없다. 동시에 조선인민의 해방투쟁과 연관짓지 않고서는 올바른 역사적 위치를 찾을 수 없다. 학살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해방투쟁의 고양은 명백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이 사건은 1910년 이후 식민지 지배와 그것을 보조했던 일본 민중이 ‘만만치 않은 적’ 조선인민에게 느꼈던 공포심이 불러온 집단 살인이자 민족 범죄였으며, 불행한 한·일 관계의 연장선에 놓인 필연적 귀결이었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 中에서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 이래에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이 발생하였다. 불운하게도 마침 점심 준비를 하던 때라 가정집에서는 미처 불도 끄지 못한 채 뛰쳐나왔고, 도시는 곧 큰 불에 휩싸였다. 흔들리는 땅,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의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40만 명에 달했으며, 65억엔의 피해액 등 엄청난 손해를 야기했다.
이 와중에 일본 정부는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일본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을 극비리에 결정,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 안에 독을 넣었다. 곧 조선인을 대거 사살할 것” 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헌데 이 근거도 없는 낭설은 경찰 조직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확대되면서 각 마을의 구성된 자경단과 경찰에게 전해졌다. 일본도, 총, 죽창으로 무장한 자경단과 경찰들은 피해자를 보면 조선인의 복장이거나 ‘주고엔 고주고센(十五円 五十五錢)’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간주하여 무차별 살해하였다.
이렇게 9월 1일부터 5일까지 광란 속에서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조선인 숫자는 기록에 따라 최소 2000여 명에서 최대 6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노동운동 지도자 히라사자와 게이시치, 사회주의의 거물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처 이토 노에 등의 일본인 사회주의자 역시 함께 죽임을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살해하는 방식마저 너무 처참하고 비상식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프랑스의 사형 집행 가구 ‘기요틴’처럼 한 칼에 머리와 몸을 벤다거나, 살아 있는 사람을 화염 속에 넣어 불구로 만드는 등의 반인류적이고 잔인한 학살은 마치 세계2차전쟁 때 이탈리아의 파시즘주의를 연상케 한다. 일본의 이러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처참한 살해는 일본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고등부 학생기자 김상규(화동제2부속중학 11)일제강점기 사건탐구③
침체된 민족운동에 활기를 ‘6·10 만세운동’ 1910년부터 일제치하에 있던 한반도는 1919년 3·1운동 이후 1926년 6월 10일,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와 조선 학생 연구회를 중심으로 시위대는 순종 황제의 장례일인 6월 10일을 기념하여 만세 운동을 추진했고, 시민들과 함께 모여 독립 선언서를 읽고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시위는 아쉽게도 사전에 일제 감시망에 발각됐지만, 학생들은 예정대로 일제 경찰 무리를 뚫고 서울 시내에서 시위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결국 맨 손으로 만세 운동에 나선 학생들은 곧바로 일제 경찰들에게 제지 당했고, 행진은 끝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이 계획된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무자비한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아픔과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에 오른 지 4년만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실의 속에 살다가 죽은 순종의 장례를 국민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격식을 갖춰 치르려 했으나 일본의 제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전통이 깃든 옷차림과 차례 등을 규제하고, 옷은 양복만 입고 일본의 차례 절차를 따르도록 지시했다. 이에 민족의 자유를 위해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황제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운동의 밑바탕에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었다.
당일 2만4천여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도 합세해 세력이 확대되는 듯 했으나 곧 제지당하며 3.1운동과 같은 범국민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비록 전국에서 1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투옥되며 실패로 끝이 났지만 일제에는 독립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열망을 다시금 확인시키며 타격을 안겼으며 이후 광주학생운동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6·10 만세운동은 온 국민이 다시 힘을 모아 투쟁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큰 횃불이 됐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등부 학생기자 이혜원(SAS 11)일제강점기 인물탐구②
조선의 간디, 고당(古堂) 조만식”내가 죽은 뒤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을 쓰지 말고 큰 눈을 두 개 새겨다오.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지켜 보리라”그 어느 때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다. 조만식 선생의 일생을 통해 조국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기꺼이 가난한 삶, 섬기는 삶을 택하는 지도자를 보았다. 시대가 요구하고 만들어낸 모습이라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조만식 선생 같은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출생과 성장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무술을 배웠고, 15세부터는 포목상과 지물포를 경영하여 사업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22세에는 기독교에 입교해 늦은 나이로 숭실학교에 입학한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무저항주의자인 간디를 롤모델로 삼아 독립 운동가로 민족주의자의 꿈을 키우게 된다.
본격적인 독립 운동
조만식은 대학 재학시절 한일합방의 치욕을 경험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오산학교 선생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2년 후 교장이 된 그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평안남도 사천(沙川)에서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에도 그는 YMCA를 창립하고 신간회를 조직하는 등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조선인은 조선 물건을 써서 애국하자’는 물산장려 운동을 주도했다. 1943년 최후의 발악을 하는 일제의 지원병 제도 동참 요구를 끝까지 단호히 거절하다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당시 조만식의 이름으로 지원병 동참을 요구하는 글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으나 이는 그의 이름을 도용한 사건이었음이 훗날 증인을 통해 밝혀졌다.
해방 직후의 활약
1945년 광복이 되자 그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했다. 소련군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다 소련군에 의해 평양고려호텔에 연금됐다. 이후의 그의 활동과 죽음을 둘러싼 여러 설이 있지만 1950년 10월 18일에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알려 져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으며, 1991년에는 그의 유발(遺髮)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고등부 학생기자 한동영(상해한국학교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