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의 셋째 아들 윌리가 앓다 죽은 몇 주 뒤 백악관 마구간에 불이 났다. 링컨은 조랑말 한 마리를 구해내려고 앞뒤 없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겁한 경호원들에게 구출된 대통령은 울고 있었다. 그 조랑말은 죽은 윌리가 아끼던 놈이었다. 링컨의 아내 메리는 아들이 숨진 백악관 '이스트 룸'과 주검을 안치했던 '그린 룸'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1988년 스물 다섯 외아들을 앞세웠다. 레지던트 과정을 밟던 '청동기처럼 단단하고 앞날이 촉망되던 젊은 의사 아들'이었다. 박완서는 부산 수녀원에서 스무 날 넘게 하느님에게 '한 말씀만 하시라'고 따졌다고 한다.
"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어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완서는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도 아들 잃은 어머니의 넋두리를 풀어놓았다. '교통사고로 반신불수에 치매 상태가 된 친구 아들이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라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 -[오태진의 詩로 읽는 세상사] 참척(慘慽),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고통 자식 잃은 슬픔 중에서 어릴 때 한문 좀 배우신 분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요,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를 수도 없이 외웠던 기억이 날 것이다.
요즘식으로 풀어 설명하면, "우리의 몸은 부모님이 물려준 것이어서, 감히 스스로 조심하여 다치지 아니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효의 시작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전문적 용어로는 존재에 대한 책임인식 정도가 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 온 다음에도, 구포 열차 사고, 비행기 추락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의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나의 안부를 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시고 전화로 나의 안전이 확인된 다음에는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하셨다'고 둘러 대시고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바로 전화를 끊곤 하셨던 부모님의 사랑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었던 것 같다.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나도 자식을 2명이나 낳아 길러 보니, 자식이 아플 때가 자기가 아플 때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리라. 자식을 낳아 보고 나서야 부모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며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키우셨는지,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 눈물에 젖은 풀포기를 뽑으며 한나절씩을 보내다 오는 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행태인가 보다.
자식이 아파서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무너지는 담벼락을 가슴으로 껴안고 있는 듯 마음이 먹먹한데, 하물며 자신보다 자식을 앞세워 저승에 보낸 부모들의 마음은 어떠하랴.
상하이에 대학생을 포함해 어린 유학생들이 1만명을 넘어서면서 학생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학생들의 오토바이 사고 소식은 더 이상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마음 속 깊은 곳 심연에 `미래에 대한 불안' '현실 도피 심리' '외로움' '심리적 고통' '무지' '무명' 등이 있어 자신이 처한 입장을 한계상황이라 인식하고 이러한 한계상황을 탈출하고 싶어 일탈을 시도하는 게 아닐까 예상해 본다.
상대성의 법칙에 따르면, 누구든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가장 힘들게 느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학생들 앞에서, "우리 때는 전쟁이 끝난 뒤라 배우기는커녕 먹을 것 조차 없었다"(한국학교 시설을 둘러보시고 나서)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왜 공부를 하지 않냐?" "너희들은 얼마나 복에 겨워 사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식의 말을, 나이 드신 어른들이 아무리 해 봐야 씨알이 먹힐 리 없을 것 같다.
나는 확신한다. 중국을 '중공'이라 칭하며 공산주의 국가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빨갱이들에게 잡혀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심리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수교가 되자 중국 땅을 밟은 한중수교 1세대들에 비해서, 부모를 따라 아니면 청운의 꿈을 안고 자발적으로 중국에 와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한중수교 2세대들이 우리 사회의 주인공이 되는 날에는, 지금보다 한중 관계는 훨씬 더 발전할 것이고, 중국 친구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한국을 이해하는 중국 사람들도 훨씬 많아질 것이고, 중국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우리의 삶의 질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우리 미래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몸을 아끼고 자중자애하며 살아가 줬으면 좋겠다.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잊지 말고 건전한 상식의 바탕 위에 중국 친구도 많이 사귀며 진정한 중국통으로 자라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한국 유학생이 헬멧도 쓰지 않고 밤에 술마시고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의식불명이 되었다는 뉴스는 듣지 않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술먹고 밤늦게 횡단보도를 건너가다가 돌진하는 차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부모님 보다 먼저 유명을 달리하는 젊은이가 더 이상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극적으로 자기 몸을 아끼라고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애심을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여러 단체에서 제공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공기관은 물론이거니와 민간 봉사 단체, 각종 종교단체 등에서도 상하이에서 자라고 공부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조금씩만 더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청소년 여러분의 몸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부모님(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일일이 돌볼 수 없어 부모님을 만들어 하느님 역할을 맡긴 것이라고도 합니다)이 주신 것이고, 이를 소중히 지키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대한 존재의 책임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