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소녀시절에 시 한 편쯤 외워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도 그 시절 가방에는 늘 작은 시집 한 권정도는 있었고 작은 녹음기에 클래식곡을 녹음해서 듣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대중가요나 소설보다 그다지 감동할 수 있는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아마 그 나이에 남들 앞에서 조금은 차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유치함도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히 작고 예쁜 핑크색 노트를 발견했다. 20대 초반 남편을 만나기 시작할 때 내가 정리해서 선물한 시집이었다. 정성스레 여러 시인들의 명시들을 적고 꾸며놓은 작은 시집을 보니 떠오르는 추억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에게 주기 위해 며칠을 준비했던 가슴설렘이 그 순간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문득 다른 사람의 시도 이렇게 감동을 주는데 시인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들어가며 사람들은 추억과 함께 산다고들 한다. 나도 내 앞에 벌어지는 일들이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전의 일들과 연관되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지만 싫지만은 않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시작했던 음악과 글들, 의미를 잘 모르고 감상했던 명화와 시들이 나에게 추억과 함께 깊게 자리잡았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님의 '거미' 라는 시다. 전혀 나에게 관심 밖이었던 흘러간 가요가 어느 순간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면 유혹하듯 한 편의 짧은 시가 내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약속 없는 만남을 기다리며 버스정거장에서 몇 대의 차를 보내기도 하고, 혹시나 하며 전철을 타고 두리번 거린 젊은 날의 기억들….
같은 가슴을 가지고도 외면당하는 노인의 뜨거운 가슴이 서글프고 삶의 무게에 지친 우리네의 열정이 사무치게 그립다. 시인은 가을 바람 속에서 대체 어떤 기다림이 그를 까맣게 태웠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바라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가을을 안다면 상해의 가을은 우리가 부르는 그저 가을일 뿐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우리나라를 떠올리며 누구는 가을을 탄다고 말하고 누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말 들 하는데 떠나온 우리들에게는 누구의 것 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 가을 문득 떠오르는, 혹은 나와 한번쯤은 인사를 나눴을 그 누구와 시 한 편 함께 나눔이 어떨까?
▷칭푸아줌마
(pbdmo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