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왕샤오보를 외에도 다행히 ‘다오얼덩’이 있다”
[사진=당대(当代) 잡문(杂文)의 일인자 다오얼덩(刀尔登)(출처: 바이두)]
베이징대 중문과 수석의 천재 작가
중국 잡문 작가 중에는 다오얼덩(刀尔登)이라는 한국 독자들에겐 비교적 생소한 이름이 있다. 1964년생으로 본명은 치우샤오강(邱小刚)이며 과거 대학 입시 당시 허베이성(河北省) 장원으로 베이징대 중문과에 입학한 명석한 두뇌의 다오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 경력을 얘기할 때면 아예 귀를 막는다고 한다. 그는 타인과의 경쟁을 싫어했는데 이는 사회 경쟁에 참여했던 자신의 가장 체면 없었던 일로 생각했던 듯싶다.
어떤 작가가 베이징대 출신 중에 82학번 전후 몇 학번을 다 합쳐서 학문적 수양, 명민함과 재능을 따지자면 다오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1977년 이후로 베이징대 중문과 출신 중 가장 유능한 3인 중의 한 명으로 단연 다오를 꼽았다.
베이징대 졸업 후에 다오는 베이징에서 취직 기회를 포기하고 고향인 허베이성 스자좡(石家庄)으로 돌아갔지만, 허베이성 사회과학원에서 10년 정도 근무하다가 이도 그만두고 잡문 간행물 편집을 거쳐 프리랜서로 간간이 글을 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문인들과도 거의 교제가 없고 소수의 친구와 같이 하는 술과 장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다오의 골수팬이 되거나, 글쓰는 직업을 포기하거나
이 시대의 ‘은사(隐士)’나 천재 같은 주변의 찬사마저 심히 부담스러워하는 다오는 출판사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묵혀둔 그간의 글을 건넬 뿐, 곳간에 쌀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절대 글로 쌀을 바꾸는데 조급해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칭찬과 물질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몇 권의 작품집을 발간했지만 창작 활동이 왕성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놓는 글마다 독자들은 기대에 항상 어긋나지 않는 그의 작품적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작가 중에서도 평생 그의 골수팬이 되기를 자처하거나 혹은 다오의 글에 위압감을 느끼고 그보다 한참 초라한 자신의 실력에 좌절해 글 쓰기를 업으로 하기를 포기한 이도 더러 있다고 한다.
다오의 글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문자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호인(中国好人)’이라는 다오의 작품집 서문을 써준 먀오저(缪哲)교수는 다오의 글을 평가하면서 “언어의 부패는 문명 부패의 원흉이다. 오늘날 한어의 혼탁함은 정신적 혼탁함의 한 표징이다. 다오가 문자를 다룰 때의 결벽은 정신적 기개의 선서나 문명 신앙의 선서라고도 할 수 있다…… 맑고 반듯한 그의 문자는 자유로운 그 사상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글을 오늘날 문명 타락의 장애물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루쉰과 왕샤오보를 잇는 당대(当代) 잡문(杂文)의 일인자
잡문을 얘기할 때, 우리가 가장 익히 알고 있는 루쉰(鲁迅)은 과거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잡문이라는 문학 장르를 세상에 확실히 각인시킨 대가로 손색이 없다. 그 후로 사후에 작품성을 더욱 인정받게 된 왕샤오보(王小波)라는 소설가이자 잡문 작가가 있다. “루쉰과 왕샤오보 외에도 다행히 다오얼덩이 있다”고 할 정도로 다오를 이 두 거장의 계보를 잇는 중국 제1의 문장 고수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있다.
엄밀히 말하면 다오의 글은 루쉰처럼 사회 현상을 예리하게 폭로하고 고발하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글이 아니다. 그의 글은 농축되고 정제된 언어, 차분한 어조로 보다 많은 이치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가 과거 접했던 내용들과는 사뭇 다른 시각으로 풀어내서 신선하고 흥미롭고 여운을 남긴다.
왕샤오보의 잡문에는 이성과 과학주의가 내재해 있으며 문자는 해학적이고 이치는 굴곡적이다. 다오는 왕샤오보와 반대였다. 문자에는 굴곡이 있지만 이치는 은근히 희학(戏谑)이었다. 왕샤오보보다도 고대 한어에 능하고 문자 능력이 더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온라인상에 혜성처럼 등장
다오는 중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던 2000년대 초반에 온라인상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었다. 작품 활동은 다소 늦게 시작된 셈이다. 초기 그의 필명은 ‘싼치(三七)’이었으며 당시는 지금처럼 시골 할머니도 핸드폰으로 쉽게 소셜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 컴퓨터를 활용해야 했던 시기라 다양한 사회 현상과 정치 관련한 온라인상의 설전도 그때는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젊은 지식인들은 “국내 논단에서 싼치의 재기(才气)가 으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그의 주장을 모아서 낸 수필집 ‘유리지붕(玻璃屋顶)’이라는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다.
그 뒤로 싼치라는 작가가 중문 창작 세계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오라는 인물이 등장했는데 역사 수필을 쓰든 잡문을 쓰든 고수의 문자란 대체로 기호 비슷한 게 있어서 눈썰미 좋은 독자들에 의해 단번에 이 두 인물이 동일인임을 간파하게 된다. 이렇게 간결하고 명쾌하고 무심한 듯하지만, 글자 하나하나의 선택이 범상치 않으며 어마어마한 사료들을 능수능란하게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기술이며 예사로운 말 한마디에도 풍기는 문인의 운치며 기발한 사고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이런 신묘한 내공은 싼치 즉 다오의 작품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서양 경전부터 중국 문화 고사까지
다오의 작품은 대부분 잡문이나 수필이며 서양 경전부터 중국 문화, 고사(古事)에 이르기까지 섭렵 범위가 넓었고 인간성과 자아, 사상과 자유 관련 방대한 지식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데 지혜롭고 비범한 식견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지식인들은 다오의 글을 갈망했으며 ‘더우반왕(豆瓣网)’이라는 사이트의 이용자들은 과거 “다오얼덩을 읽으셨나요?”라는 구호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다오는 글에서 자신의 현재 삶 외에도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현재 이 시국이 한어 역사에서는 가장 암담한 한 페이지라고 단언하는 작가도 있다지만 이러한 때에 고급스러움과 품격이 돋보이는 글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유혹을 경계하며 세속에서 인정받는 보통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던 그의 용기와 삶은 이 시대의 최고 지성이 아닌가 싶다.
다오의 명문장
다오의 글 속 명언 몇 개를 살펴보며 그의 작품 세계를 살짝 엿보고자 한다.
▲정말 죄 없는 사회가 출현한다면 그것은 악을 저지르는 능력이 통치자에게 독점되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뿐일 것이다. –‘중국호인(中国好人)’ 중
▲원한에 빠지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훨씬 지속되기 쉽다. 사랑은 애써 지켜야 하지만 원한은 양양분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칠일담(七日谈)’ 중
▲약자를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빨리 타락한다. 처음에는 그냥 화가 났을 뿐이지만 곧 자신이 나쁜 짓을 하도록 허락하게 된다. 자신은 억울한 쪽이기에 자신의 어떤 행위도 다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용인하면서 다른 사람도 자신을 동정할 줄 알았지만, 밖의 여론이 자신의 작은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옛 산하(旧山河)’ 중
▲개인의 자유는 반드시 사회로부터 찾아야 한다. 사회의 성공은 반드시 개인에게도 이르러야 하는 것처럼. 자유는 압도적 권력 집중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 ‘옛 산하(旧山河)’ 중
▲오랫동안 어떤 것을 미워하면 그것이 정말 악한 것이라도 자신을 바꿔버릴 수 있다. – ‘증오의 힘(恨的力量)’ 중
▲한 나라를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천국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의 노력 때문일 경우가 많다. – ‘유리지붕(玻璃屋顶)’ 중
▲사실 예교(礼教)는 스스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달갑게 죽임을 당하도록 설득하고 그 참상을 묘한 일로 서술하는 것만 책임진다. – '중국호인(中国好人)’ 중
김향려(mshina0520@naver.com)
ⓒ 상하이방(http://www.shanghaiba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