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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상하이 259] 사건

[2024-11-14, 20:31:45] 상하이저널
아니 에르노 | 민음사 | 2019년 11월 01일
아니 에르노 | 민음사 | 2019년 11월 01일
원제: L’evenement/Happening

올여름 오랜만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속상하게도 자궁에서 폴립이 발견되어 처치를 받기 위해 산부인과 예약을 했다. 병원에 가기 전부터 심란했다. 산부인과는 치과보다 더 가기 싫은 곳이다. 

혼자 병원에 가서 덩그러니 시술대에 누워있으니 두려움이 나를 눌렀다. 그때 불현듯 올봄에 읽었던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 스쳤다. 나는 중년의 나이로 출산도 해봤고 산부인과 검진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음에도 낯설고 불안한데 작가는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얼마나 심란했을까 싶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자신의 슬픔을 나눌 수도 없이 임신 중단 불법 시술을 받아야 했던 작가는 어땠을까…

그렇게 “사건’을 다시 꺼내 들었다.

“사건”은 1963년에 작가가 겪은 수난의 기록물이다. 당시 작가가 살던 프랑스에서 임신 중단 시술은 불법이었으므로 작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이를 낳고 사회적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시술을 받고 처벌을 받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사회의 이해와 배려 속에서 안전하게 시술받을 권리는 없었다.

P74
방에서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들었다. 독일어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암송하는 복음주의자의 고독한 목소리가 퍼졌을 때, 그것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된 10월부터 1월 사이의 내 시련처럼 여겨졌다.  ~중략~
탐침관과 피가 세계의 고통과 영원한 죽음 속에 녹아내렸다.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이 에세이는 1963년 10월, 그녀가 임신 사실을 인지한 시점에서 시작된다. 임신 중단을 결심하지만, 지금처럼 SNS가 있던 시기도 아니라 정보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과 간행물을 검색해 보지만 임신을 중단하는 과정과 방법에 관한 어떠한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지나는 막막함, 처절한 시도와 실패 그러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힘을 내어보는 저자의 고군분투가 기록되어 있다. 

1964.1.20- 21 “사건”은 종결된다.
P64 ~65
나는 짐승이었다. 
중략
O가 방에 가서 빈 비스킷 봉지를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그 안에 그것을 넣는다. 나는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간다. 안에 돌멩이가 있는 것 같다. 변기 위에서 봉지를 뒤집는다. 변기 물을 내린다. 
일본에서는 중절한 태아를 미즈코(水子), 물의 아이라 부른다.
그날 밤의 행동들은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 당시 그렇게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그녀는 과다 출혈로 다시 위기에 빠진다.
P66
당직 의사가 들어오는 장면으로 그날 밤의 2부가 펼쳐진다. 그 밤은 삶과 죽음의 순수한 경험에서 폭로와 심판의 자리로 바뀌었다.

저자는 살아남았고 30년이 훌쩍 넘어 1999년에 이 기록물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프랑스에서는 당시 불법 임시 중단으로 사망하는 여성이 한 해 250명(통계에서 드러난 숫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불법 임신 중단 시술과 밀입국의 유사성을 책에서 언급한다.
P59 
이 글을 쓰던 시기에, 코소보 난민들이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항 업자들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고, 때로는 밀항 전에 잠적해 버린다. 그럼에도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다른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밀항업자들을 쫓는다. 삼십 년 전에 임신 중절 시술자에게 그랬듯이 밀항 업자들의 존재를 몹시 못마땅해한다. 누구도 그 존재를 부추기는 법률이나 국제 사회의 명령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 임신 중절 시술을 해 주었던 이들처럼, 이민자들의 밀항을 돕는 이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올바른 이들도 분명 있으리라.

과거 사건의 기록과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작가 자신의 소회가 얼기설기 엮여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처음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솔직하나 싶어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었다. 다시 “사건’을 읽으며 미니멀하면서 세련되고 우아한 문체로 이야기하는 아니 에르노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그 풍미를 좀 더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기
프랑스는 1975년 낙태죄가 폐지되고 임신 중지가 합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임신 중단 시술이 건강 보험 적용이 되고 국민의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함으로써 임신 중단 수술을 줄이는 것을 궁극적인 국가 차원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2019년 낙태죄가 폐지되었다. ‘임신 중지는 죄가 아니다’ 정도의 수준에 와 있다. 

최수미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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