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ing to teach, Teaching to learn”
저의 대학원 은사님의 책상에 늘 붙어있던 말입니다. 교사는 평생 배움에 대한 학습자라는 말은 그 분이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듣고, 당신이 들은 게 정확한 지 다시 반문하는 대화법에서도 늘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대학원 재학 시절, 교사는 곧 학습자라는 교수님의 말씀은 늘 배움에 대한 겸손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선생님은 (이제 어른이니까) 공부 안 해서 좋을 거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필요에 의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강요에 의해서든 우리는 평생 배웁니다. 아기가 생기면 육아법을, 여행하기 위해서 그 나라 특성을, 옮긴 회사의 새로운 시스템을, 심지어 핸드폰 하나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매뉴얼을 정독하고 심지어 관련 카페에 가입하여 공부해야 하는 등, 현대 사회에서 배움을 완전히 외면하며 살기란 힘든 일이지요. 이렇게 배움은 배움이라고 굳이 인식하지 않아도 평생 하는 인간의 독특한 활동입니다.
그러나 배움은 단지 안주하고 정체하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어른들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에 대한 꾸준한 계발이 필요하다는 걸 압니다. 현장의 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일 뿐 만 아니라 더 발전된 창의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배움은 완성된 정점이 있는 게 아니라 새롭게 발견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모험의 다른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일수록 새롭게 보거나 다르게 시도하기 힘듭니다. 갈등이 있는 부부나 부모-자녀가 서로에 대해 하는 가장 흔한 말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관계일수록 교류하는 방식도 하나의 습관이 되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배움도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은 수년 째 자기에게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식으로 학습합니다. 새로운 공부법을 듣거나 보면 당장은 자극제가 될 수 있지만, 능동적으로 학습습관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교사 또한 학기 처음에는 교수법의 변화를 고민하고 새로운 학생들과의 교류를 의욕적으로 시도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느슨해지고 학생과의 관계도 느슨해지곤 합니다.
우리말 '가르치다'는 “(밭, 돌 등을) 갈다”라는 말과 “기르다”라는 말이 합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들 마음 속에 있는 밭을 갈아 그들이 씨앗도 심고 그 씨앗을 잘 길러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것이 저 네 자에 깊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른 밭이 콩 밭인지 고구마 밭인지 살피지도 않고 무작정 같은 영양분만을 공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배움을 늘 살펴야 하고 배움에 대해 항상 배워야 함을 전제합니다.
우리말 '가르치다'는 “(밭, 돌 등을) 갈다”라는 말과 “기르다”라는 말이 합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들 마음 속에 있는 밭을 갈아 그들이 씨앗도 심고 그 씨앗을 잘 길러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것이 저 네 자에 깊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른 밭이 콩 밭인지 고구마 밭인지 살피지도 않고 무작정 같은 영양분만을 공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배움을 늘 살펴야 하고 배움에 대해 항상 배워야 함을 전제합니다.
한편 배움은 흉내 낸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행동은 곧 가르치려는 나를 모범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학생이나 자녀가 내게서 배웠으면 하는 것은 모방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생 배움을 보여줌으로써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예의도 함께 익힐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만약 학생이나 자녀가 배움을 즐기길 바라면서 자신은 이미 “어른” 혹은 “전문가”가 되어 배움에 노력할 필요도, 앎에 겸손할 필요도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들에게도 배움이란 지루하고 불필요한 행위로만 비춰지게 될 것입니다.
ⓒ 상하이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