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깃발 통해 본 한-일 관계
15일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68돌을 맞게 되지만, 한-일 관계는 걸핏하면 격랑에 휩쓸리곤 한다. 최근 한-일 간에 떠오른 새로운 이슈는 이른바 ‘욱일기 논쟁’이다. 한국에선 욱일기를 ‘전범기’로 규정하며 일본에 사용 자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에선 국기인 일장기와 다름없는 자국의 상징이라며 절대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욱일기가 두 나라 사이에 민감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8월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박종우 선수가 일본을 꺾은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씌인 종이를 들고 세레모니를 한 것이 계기였다. 이에 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박 선수의 행동을 ‘경기장에선 허용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라고 지적하며 징계 방침을 밝히자, 한국 누리꾼들이 일본 체조선수들의 유니폼에 욱일기의 도안이 사용된 것을 문제 삼으며 반격에 나섰다.
이후 욱일기 논쟁은 축구 한-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재연되고 있다. 런던올림픽 직후인 지난해 8월 일본 도쿄에서 20살 이하 한-일 여자 축구대표팀 경기가 열렸을 때도 다시 한번 큰 논란이 일었고,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축구대회 때는 두 나라 정치권까지 나서 막말을 주고받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그라운드서 불붙은 제국주의 논쟁
한국 “전범기 사용 자제” 요구
일본 “자국 상징 깃발일뿐” 맞서
악화된 한-일 관계 더욱 얼어붙어
욱일기 논쟁이 독도, 위안부, 개인 청구권 등 한-일간의 기존 현안들과 구별되는 점은 대중에게 인화성과 전파력이 강한 ‘스포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베 일본 총리의 잇따른 망언과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에 욱일기가 기름을 붓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 정부가 “욱일기 사용에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정부 의견을 정했다는 보도(<산케이신문> 6일치)가 나왔지만, 이 문제를 방치했다간 축구 한-일전이 있을 때마다 한-일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대체적인 여론은 욱일기는 일장기처럼 일본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깃발인데 한국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60여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해 온 깃발을 이제 와서 문제 삼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우리는 이 욱일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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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8일 서울 송파구 잠실운동자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축구선수권대회의 일본과 경기에서 붉은악마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커다란 초상화를 펼치고 있다 |
욱일기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일본이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때로 시선을 돌려 봐야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일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각 번(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영주들의 군대를 한데 묶어 ‘천황의 군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1879년 천황을 위해 숨진 이들을 기리기 위한 야스쿠니 신사가 만들어졌다.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군인들은 이제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황군이 됐다. 이를 통해 일본은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신앙을 만들어 수많은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천황의 군대를 떠받치는 수많은 행정 조처가 뒤따랐다. 구체적으로 새로 만든 군대의 병제는 어떻게 할지, 군복의 모양은 무엇으로 어떻게 통일할지, 장교와 사병의 계급을 어떻게 구분하고 뭐라고 부를지, 군기는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 등의 문제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본 정부는 1870년 5월15일 태정관 포고 355호를 통해 욱일기를 일본 육군의 정식 깃발인 ‘육군어국기’(陸軍御國旗)로 채용한다. 그와 함께 구체적인 모양도 정해진다. 이에 따르면, 욱일기는 가로 4척4촌(134.2㎝), 세로 5척(152.5㎝)의 네모난 모양에 태양을 상징하는 빨간 원인 ‘히노마루’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16개의 광선을 쏘는 모양으로 규격화된다.
히노마루에서 발산되는 광선의 수가 왜 16개가 됐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천황가의 문장인 국화의 꽃잎이 16개인 데서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예전부터 일본 민간에서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된 욱일기의 문양에 천황의 위세가 사방으로 확산된다는 의미가 결합된 것이다.
이후 욱일기는 1899년 칙령 제111호를 통해 육군뿐 아니라 해군기인 군함기로도 채용되게 된다. 모양은 육군기와 대체로 같지만 히노마루가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게 특징이다.
일본은 이 욱일기를 앞세워 러-일 전쟁(1905년)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를 병탄(1910년)했으며, 만주사변(1931년)을 도발하고, 중-일 전쟁(1937년)과 태평양 전쟁(1941년)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간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마음속 욱일기는 일본인의 기상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아간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들에게는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일본이 패전한 이후의 ‘전후 처리’였다. 일본 육•해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해체됐다. 그러나 욱일기 문양은 여전히 일본 육상•해상 자위대의 깃발로 살아남았다. 이 중에 육상 자위대 깃발에 새겨진 광선의 수는 8개로, 애초 16개였던 옛 육군 시절과 조금 달라졌지만, 해상 자위대의 깃발은 일본 해군 시절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2년 8월14일 방송된 일본의 공영 방송 <엔에이치케이>(NHK)의 ‘다큐 스페셜’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해상 자위대는 소련 봉쇄를 위해 일본의 해군력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는 미국 정부의 판단에 따라 옛 해군 인사들이 다시 모여 만든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일본 해군을 재건하기 위한 옛 해군 간부들의 비밀 연구는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8년 1월부터 시작됐다. 이 연구를 주도한 주인공은 해군의 군령부(한국의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성(한국의 해군) 등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요시다 에이조 해군 대좌(한국의 대령)였다. 그러나 요시다 등이 아무리 완벽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고 해도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승전국 미국이 승인하지 않았다면 해군의 재건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버렸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전면적인 협력과 지원을 업고 1952년 4월 지금의 해상 자위대의 전신인 해상 경비대를 창설한다. 육상 자위대가 옛 일본 육군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육군 출신 인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 새로 만들어진 해상 경비대의 간부들은 대부분 옛 해군 출신들로 충원됐다.
결국 반공과 냉전의 토양 위에서 지난 과오를 전혀 청산하지 못한 채 과거의 역사와 전통, 깃발까지도 그대로 이어받은 새로운 조직이 탄생한 셈이다.
육•해상 자위대 깃발로 남은 욱일기
주변국엔 전쟁 반성 않는 상징물로
일본선 ‘욱일기 부정’ 한국에 반감만
일각선 “양국 차분한 접근을” 주문
일본의 해상 자위대가 옛 일본 해군의 깃발뿐 아니라 조직과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이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최근 욱일기 논란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욱일기의 이면에는 ‘청산되지 못한 전쟁 책임’과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전후 일본의 중요한 특징이 녹아 있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욱일기는 전쟁 전의 침략의 상징에서 전후 ‘평화 일본’을 떠받치는 양대 축인 육상•해상 자위대의 깃발로 ‘세탁’될 수 있었다. 일본 자위대도 이 점에 신경이 쓰였는지 누리집에 “(해상 자위대기의 모양을 새로 정하기 위해) 세차례 공모를 했지만 지금의 도안보다 나은 게 없었고, 이미 해외에서도 욱일기가 일본을 상징하는 깃발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옛 깃발을 계승했다”는 해명을 달아두고 있다.
이렇듯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욱일기는 일본인들의 삶 속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일본판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보면, 욱일기는 현재 일본 축구 대표팀, 빨강을 상징색으로 쓰는 일본 프로축구팀 ‘우라와 레즈’ 등의 응원기로 쓰인다. 그밖에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신문인 <아사히 신문>의 사기도 욱일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이렇듯 오랜 역사와 광범한 활용, 전후 청산의 실패로 인해 일본의 욱일기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철십자)와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은 현재의 일본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심지어 일본 우익을 대변하는 <산케이 신문>은 “국기와 거의 다름없는 깃발을 적대시하는 외국 정부(한국)나 군(한국군)과 충실한 협력이 가능할 리가 없다”며 서로 협력하며 살아야 하는 한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욱일기를 부정하는 한국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태도인 셈이다.
일본의 이런 수구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도 강경론과 원칙론을 부른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욱일기가 최근 들어 한일 간의 중요한 쟁점이 된 배경엔 지난 10여년 동안 우경화의 길로 달려온 일본 사회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 깃발 아래서 2000만명이 넘는 아시아 민중들이 숨졌는데 이 깃발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한-일 두 나라 모두 이런 문제를 좀더 차분하게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한 일본 언론 특파원은 “욱일기를 일절 사용하지 말라는 요구는 일본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국을 자극하기 위해 욱일기를 갖고 나온 일본 응원단의 행동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또 “한국이 역사 문제에서 일본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이 조금만 더 일본인의 입장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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