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항일투사 33인-8]
민족문화 끝까지 수호한 이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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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화 '조선의 궁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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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문화가 말살되는 현실을 타파하고자, <경성기략>(1918), <경주기행>(1922), <조선의 궁술>(1929) 등을 저술하여 우리의 고유문화와 문화유적이 보존되기를 염원한 학자가 있었다.
개성의 문화 유적(선죽교, 만월대, 남문의 종루, 박연폭포의 연혁)에 대해 ‘개성의 고적’이라는 글을 <반도시론>(1918)에 3차례 연재하였다. ‘경성건설의 梗槪’(<반도시론>, 1918)라는 글에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역사(궁궐, 도성 성곽, 4대문 등)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아울러 일제 말기 7년간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조선어사전 편찬에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의 탄압을 받아 2년 3개월 이상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해방 뒤 다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말큰사전>의 편찬위원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됐다. 아직까지 생사확인도 알지 못한 상태에 있고,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포상하나 받지 못하였다. 이 인물이 바로 이중화(李重華, 1881∼? 호는 동운(東芸))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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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 이중화 |
일제강점기에 그는 <조선의 궁술>(1929)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이중화는 조선민족의 꺾이지 않는 기상을 드러내었다. 이 책은 조선궁술연구회가 조선역사학계의 권위자였던 이중화에게 편찬을 부탁하여, 그가 저술한 명저이다. 조선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활과 화살에 대해, 활쏘기에 대한 일을 방대한 역사문헌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아울러 105명에 달하는 활쏘기 명인들의 역사를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기술하였다. 삼국시대 8인, 고려시대 23인, 조선시대 74인을 다루었다. 그 가운데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인 12명을 기술하였다. 김여물, 심수경, 이순신, 황진, 김명원, 장응기, 신호, 정발, 임정식, 홍수남, 류형, 신정의 위국헌신한 활약상을 서술하였다.
예로 들면 이중화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1591년에 전라좌수사를 제수 받으니 공이 좌수영에 있으면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하였다. 공적인 업무를 마치면 날마다 장수들과 더불어 활쏘기를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중흥의 큰 공을 세웠다. 선조 31년인 1598년 노량의 해전에서 순국하니 나이가 54세이다. 시호를 충무라 하였도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서술로 이중화는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朴龍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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