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겪은 한국과 중국은 과거 역사 속 정서적 아픔을 공유한다. 이 두 민족의 슬픈 기억은 상하이 거리 곳곳에 함께 깃들어 있다. 신천지에 임시정부청사 외에도 세 곳의 공원에서 독립운동가들과 당시 나라를 잃은 한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또 홍커우구에는 매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국을 위해 몸바친 윤봉길 의사 이외에도 힘없는 조국으로 인해 근대 제국주의 역사의 희생양이 됐던 위안부 소녀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신천지 新天地
한인 자녀들의 민족교육기관
인성학교 옛 터
민족교육기관인 인성학교는 1917년 여운형이 설립해 조선인 자녀들을 교육하는 교회 소속 사립학교로 시작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산하 기관에 속하게 됐고, 1920년 상하이한인거류민단 소속의 공립학교가 됐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일본어교육을 실시하라고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교사들이 사직하면서 사실상 1935년 폐교됐다. 현재 인성학교 옛 터에는 SOHO 건물이 들어서 있다.
•黄浦区马当路404号, SOHO复兴广场
•지하철 10호선, 9호선 마당루(马当路)역 5번 출구 도보 5분
한인들의 안식처
프랑스공원(현, 푸싱공원)
프랑스 조계 동쪽지역 살던 한인들에게 프랑스 공원(현 复兴公园)은 휴식 같은 장소였다. 좁은 스쿠먼(石库门) 주택에서 세 들어 살던 한인들이 호수를 따라 산책 나섰던 곳이다. 형편상 병원을 갈 수 없었던 한인들에게는 요양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는 매일 밤 9시부터 조계당국에서 마련한 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와 다양한 경축행사를 즐기기도 했다. 화려한 경축행사가 거행됐을 프랑스혁명 기념일은 한인들에게 더없이 즐거운 날이었을 것. 또한 이곳은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노백린 장군이 노년을 보내다 숨진 숭고한 장소이다.
•黄浦区复兴中路复兴公园
•06:00~18:00
•무료
•지하철 10호선 신톈디역 5번 출구 도보 10분
안중근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묘
징안쓰 공묘(현, 징안공원)
난징시루의 징안공원(静安公园)은 1953년 상하이시 개발 이전에는 정안사 공묘(静安寺公墓)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곳 외국인 묘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대통령을 지낸 역사학자 박은식과 노백린, 안태국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과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 등이 안장돼 있었다. 현재 징안 공원 한 쪽에는 넓은 잔디 광장과 외국인 묘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리석의 정자가 남아있다.
•静安区南京西路1649号
•4월~9월 05:00~18:00, 10월~3월 06:00~18:00
•지하철 2호선 징안스(静安寺)역 5번 출구, 지하철 7호선 9번 출구, 도보 5분
김구선생 부인 최준례 여사의 묘
바셴차오 공묘(현, 화이하이 공원)
타이캉루(太仓路)가 끝나갈 무렵 조그마한 공원이 나오는데 화이하이공원(淮海公园)이다. 원래 화이하이 공원에는 20세기 초 바셴차오 공묘(八仙桥公墓)라 부르는 묘원이 있었는데, 1924년 1월 4일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그곳에 안장됐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이장됐다.
•黄浦区淮海中路177号(近普安路)
•관람시간 4월~9월 05:00~18:00, 10월~3월 06:00~18:00
•지하철 1호선 황피난루(黄陂南路)역 2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8호선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5분 이내
#황푸구 黄浦区
안창호가 애용하던 숙소
용안회사 대동여관(현, 용안백화점)
용안회사 대동여관(永安公司 大同旅舍)는 1920년대 안창호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던 시절 가장 많이 애용하던 곳이다. 영안회사 내에 있는 대동여관(大同旅舍)의 음식점인 다차이로우(大菜楼)에서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 59명이 모여 신년축하식을 하고 옥상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요인들의 모습이 있는 가장 잘 알려진 기념사진을 남겼다. 현재 영안회사는 용안백화점으로, 대동여관이 있던 자리에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黄浦区九江路600号
•지하철 1, 2, 8호선 인민광장(人民广场)역 7번, 19번 출구, 도보 3분
중국혁명가들과 신해혁명을 함께 한
신규식 거주지
프랑스 공원 옆에 현재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주거단지가 있다. 이곳에는 항일 독립운동과 중국의 신해혁명을 연결 짓는데 중요한 인물이었던 신규식이 거주한 흔적이 남아있다. 신규식은 난창루 100농 5호의 2층에 살았는데 중국 신해혁명의 주요 인사였던 천치메이(陈其美)와 같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앞집에 살던 5·4운동의 핵심 인물 천두시우(陈独秀)와 교류하기도 했다. 현재 난창루 100농 5호는 ‘신청년’을 발행한 100농 2호와 함께 상하이시 유적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黄浦区南昌路100弄5号
•지하철 1호선 황피난루(黄陂南路)역 도보 5분 13호선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역 도보 10분
김구와 윤봉길의 마지막 식사
김해산의 집
당시 한인 애국단을 이끌던 김구는 홍커우 의거 전날 한인 애국단원이었던 김해산에게 소고기를 사다 주며 아침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이 김해산의 집에 오자 아침 식사를 함께 한 뒤 김구는 윤봉길에게 물통과 도시락 폭탄을 건넸다. 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새로 산 시계를 김구의 시계와 맞바꾼 뒤 차를 타고 홍커우 공원으로 가서 의거를 실행했다. 김해산의 집은 김구와 윤봉길이 마지막 만찬을 나눈 역사적인 장소였던 것이다.
•黄浦区元昌里13号
•지하철 1호선 황피난루(黄陂南路)역 1번 출구, 도보 5분 13호선 화이하이중루(淮海中路)역 1번 출구, 도보 5분
#홍커우구 虹口区
한민족 독립의 염원이 담긴 장소
매헌기념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한 청년의 마음을 기리는 장소가 있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 및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에서 윤봉길은 폭탄을 던졌다.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를 즉사시켰으며, 많은 일본군 사령관에게 중상을 입혔다. 대한독립의 염원을 세계 열국에게 알렸으며,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당시의 홍커우 공원은 현재 루쉰 공원으로 개명됐으며 매헌 기념관은 루쉰 공원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많은 사람의 왕래를 맞이하고 있다.
•虹口区四川北路 2288 号鲁迅公园内
•15원
•07:30~18:00/~18:30(7~9월)
•지하철 3호선 홍커우축구장(虹口足球场)역 1번 출구, 도보 6분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일본 해군 육전대 사령부
상하이를 넘어서 중국에 대한 일본 침략의 중심에는 일본 해군 육전대가 있었다. 1931년 1차 상하이사변 시기 1.29일 19로군과 싸우며 상하이사변의 시작과 확산의 기점역할을 하였다. 또한 1937년 8월 13일 2차 상하이사변의 시기에도 중국군의 포위에 맞서서 싸우며 중일전쟁의 전면화를 이끌었다. 이 일본 해군 육전대 사령부가 홍커우 공원으로부터 1km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는 중국의 군사기지화가 되어서 통제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건물 후면에는 이 곳이 일본 해군 육전대 사령부로 사용됐음을 알려주는 서판이 존재한다.
•虹口区四川北路2121号
•지하철 3호선 홍커우축구장역 1번 출구, 도보 9분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大一沙龍)
일본해군육전대사령부가 있는 곳에서 불과 1.4km 떨어진 곳에 일본 최초의 위안소인 다이살롱이 존재했다. 다이살롱은 일본 해군이 특별히 지정해 세운 위안소 중 하나로서 1931년부터 1945년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 운영되었다. 운영초기 일본 기생들이 운영하는 술집으로 운영됐지만, 일본의 군국주의가 본격화되며 위안소화 됐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많은 여자들이 제국주의 일본의 칼날 앞에 보호 받지 못하고 다이살롱으로 끌려와 수 많은 일본군에 의해서 아픔을 겪었다. 한편 중국 정부의 관리를 받지 못하고 현재는 그저 다세대 주택으로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됐다.
•虹口区 东宝兴路125弄
•지하철 3호선 동바오싱루(东宝兴路)역 2번 출구에서 도보로 8분
정리: 공건 인턴기자
참고: 상하이 고고! 화동고고!
상해의 한국문화지도(上海的韩国文化地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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