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억압을 이겨내고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적 힘이 서려 있는 상하이에 드디어 우리 손으로 지은 학교가 준공되었다. 한국학교는 일제시대 망국의 한을 품고 상하이에 건너온 이민 1세대 자녀들과 독립인사들의 자녀를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인성학교의 얼과 정신을 이어 받았다.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던 인성학교는 일제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15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된다. 당시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최소해여사를 만나 당시의 상황과 역사를 들어보았다.
최소해여사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부위원장, 법무 총장 등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최창식씨의 딸로 해방 후 한국으로 귀국, 성신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적십자사의 섭외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교사로 재직하며 주말학교에서 한글교사로 봉사 활동을 펼치다가 87년 교직에서 은퇴하고 인성학교 졸업생들의 구심점으로, 독립운동가의 모임등의 구심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상하이 방문도 한국 인천 월미도 이민사 박물관에 소장될 독립 인사들의 유물과 역사의 증언을 위해 상하이를 찾은 것이라고 한다.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에도 최여사는 인성학교를 찾아 보고 대부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인 당시의 이웃들과의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60년이 지난 현재 다시 찾은 인성학교는 약간의 외형적인 변화는 있지만, 발코니 난간에서 밖을 내다보기 위해 올라서던 계단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한다.
인성학교는 당시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워 현재의 마당루 임시정부 청사 부근의 주택을 임대하여 학교로 사용하였지만 교사들 봉급조차 제대로 줄 수 없어 각 학생의 가정에서 한 달씩 돌아가며 숙식만 해결해 주는 방법으로 인성학교를 운영해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의 힘으로 학교를 신축하고 우리아이들이 마음껏, 자유롭게 한국교육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상하이에 건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격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인성학교 재학 시절 선우혁교장선생님이 "조선 정신차려, 조선사람이야"라고 늘 훈화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각 난다는 최영하 여사는 한국학교학생들에게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영어 등을 비롯 최소 4개 국어를 익히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지금의 세계는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시대인 만큼, 세계인을 친구로 두기 위해선 언어 습득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늘 나라의 미래와 안위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선조들에 위해 현재의 우리가 있다. ▷나영숙기자
상해시 노만구 마당로 협성리 1호(현 마당루 404호)에 위치한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27일 설립되었으며 여운홍 선우혁 이유필 등이 학교를 운영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임정이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났다. 상해에 남은 교민들은 인성학교를 지켰으나 1935년 11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