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꽃 몇 년 전 일이다. 평소에 늘 등산으로 건강을 다져서 나랑 전혀 다른 체급과 체력의 언니가 갑자기 수술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남편 하나밖에 없는 누나였고 나한테는 시누이였는데 초면 호칭 그대로 굳어져서 나한테는 항상 언니였다.
크든 작든 수술이라고 앞두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그땐 직장 다니며 아이들 키울 때라 그런 마음을 위로해 주러 훌쩍 떠나지 못하는 내 상황이 한스러웠다. 속이 타 들어 가는 가운데 수술 날짜가 되었다. 출근해서도 언니 생각만 나면 눈앞이 자꾸 뿌얘졌다.
아들 넷인 집안에 고명딸이라 지금도 아버님 어머님께는 어릴 때 이름인 복덩이로 불리지만 언니 삶은 그 이름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시어머니가 산후풍으로 3년을 꼼짝도 못 하고 와병 상태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언니는 고작 열한두 살 나이에 청소며 설거지 같은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당시 엄마가 죽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라 한겨울에 냇가의 얼음물을 깨고 하는 빨래든 산길을 내려가 물동이로 물을 나르는 일이든 손가락이 퉁퉁 얼어 터져도 아픈 줄도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공부를 하고 야간에는 힘들게 일하며 상고를 졸업했는데 부산에 취직한 딸을 아버님이 서울로 보내셨단다. 바로 밑에 남동생(훗날 내 남편 된 사람)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게 되니 서울서 같이 살면서 동생을 보살피라는 아버님 어명이었다.
언니는 다시 서울에 직장을 잡았고 아버님이 다달이 서울로 월세 정도의 돈만 보내시면 누나가 자기 급여로 동생 생활비랑 본인 생활비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십 대의 꽃띠 아가씨면 얼마나 꾸미고 싶고 사고 싶은 게 많았을까. 얼마 되지도 않는 공장 급여로 동생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으니, 언니는 결국 본인 결혼자금도 모으지 못한 채 서러운 마음으로 결혼한 거로 안다.
결혼한 후에도 삶이 편안하진 못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성실한 남편이지만 젊은 시절의 아저씨는 언니 속을 무던히도 썩이셨다. 천방지축인 사내애 둘을 낳아 기르며 미싱(재봉) 일도 다녔는데 밤에는 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헤매야 했던 언니.
나는 한국 들어갈 때마다 당연히 언니 집에 묵는다. 갈비찜이든 김치찌개든 밥상에 올려지는 대로 바로바로 집어먹으며 감탄사를 연발하면 언니는 항상 웃는 눈이 더 실눈이 되고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사진=언니가 키운 선인장이 몇 년 만에 드디어 꽃이 피었다. 꼭 언니 미소를 닮은 하얀 꽃.]
언니는 내가 한국 들어갈 때마다 “너희 이담에 진짜 한국 들어와 살 거야?“하고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어보신다. 여태 식구들을 그렇게 챙기고 살았으면 이젠 질렸을 법도 한데 내 딸까지 걱정하신다.
“소이야, 고모네 집에서 대학 다녀야지 여자애 혼자 자취하면 위험해서 안 돼.”
언니는 나한테 받은 거도 없으면서 아직도 가까이서 나한테 착취당할 날만 기다리고 계신다.
공항 입국신고서 쓸 줄 몰라 중국에 우리 보러 자주 못 오겠다며 쑥스럽게 웃는 언니. 술 한잔 들어가면 여린 마음을 끝내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야 마는 언니.
반평생 이유 불문한 헌신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온 언니도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겼다. 올해 설에도 주변을 챙기느라 분주할 언니는 시가, 친정 통틀어 남자들뿐인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다. 언니가 또 보고 싶다.
소이(mschina05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