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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이병률 시인의 북콘서트가 있었다. 주옥같은 언어들을 놓칠세라 메모를 하며 강연을 들었다. 메모 중 별표를 세 개나 친 부분이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나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일찍 알았다. 상대를 힘들 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의 소신 발언은 어떤 시보다 나의 공감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나도 한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결단력 있게 솔로를 택한 시인의 태도에 찬사를 보낸다.
나는 국제결혼을 했다. 스물 한 살에 남편을 만나 험난한 반대의 파도를 항해한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가장 마음이 끌렸던 부분은 그의 문학적 안목과 소질이었다. 나에게 선물한 시는 모두 한국어로 쓰였는데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쓴 시는 어색함보다는 깊이가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문학에 대해 자신의 감상과 해석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남편의 하루는 새벽 5시쯤 독서와 시 쓰기로 시작된다. 아침마다 시 한 편을 쓴다. 시상이 마르지 않고 솟아오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산책을 한다. 일을 마친 저녁에는 긴 독서를 하거나 영화를 본다. 이것의 그의 일상 풍경이다. 가끔 이런 말도 덧붙인다. 아이들 다 크면 산에 들어가 살겠으니 자기를 찾지 말라고. 산에서 조용히 살다 생을 마감하겠노라고.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이것은 그에게는 ‘낭만’이지만 나에게는 ‘불만’이다. 나는 그가 아침에 시 쓰는 것도 여유로운 독서도 탐탁지 않다. 산에 들어갈 거면 애들 클 때까지 기다릴 거 뭐 있나? 코 앞이 그 유명한 서산인데 지금 들어가시지.
나는 매일같이 동분서주 바쁜데 여유 있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한 번씩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혼잣말을 내뱉는다.
"우리 남편은 그냥 결혼 안 하고 혼자 살았어야 해. 자신에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결혼은 무슨 결혼. 혼자 살았으면 더 행복했을 거야."
평소 내가 하던 생각을 작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북 콘서트 마지막은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번쩍 손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저는 결혼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인데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소심함에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수십 번 웅얼거리다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물어보지 못한 걸 후회했다. 과연 시인은 어떤 답을 했을 지 궁금하다.
오늘도 남편은 산책 길에 주워 온 마른 나뭇가지를 건네며 웃는다. 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심신을 편안하게 한단다. 나는 설거지를 도와주면 심신이 편하겠는데 말이다. 책상 위에 그가 준 나뭇잎, 도토리, 억새풀, 조약돌, 나무껍질을 한참 동안 흘겨봤다. 12월이면 결혼 20주년이 된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그의 시(詩)적 생활을 관대히 허용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건너온 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인정뿐이다. 이것은 나의 건강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바다일기_mer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