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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 in 상하이] 결정장애人의 정당한 소망

[2024-02-03, 06:15:40] 상하이저널
가끔 한글 책이 무척 그리울 때가 있다. 한국어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차이,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문장 속에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울림에는 모국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포근함이 있다. 나는 태어남도, 성별도, 국가도 직접 선택하지 않았지만, 숙명적으로 갖게 된 이 모든 것이 대단히 만족스럽다. 상하이를 터전으로 선택해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자동 입국심사에서 <귀국을 환영합니다>라는 메시지를 확인할 때면 큰 기쁨과 안도감을 느낀다.

모국어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시점, 한국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귀한 한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최진석 교수님의 신간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이라는 책이었는데, 총 10권의 서로 다른 책에 대한 이야기와 교수님의 독후감이 함께 실려있다. 한 자 한 자 아껴가며 읽다 드디어 다다른 9번째 장은 중국 작가 루쉰의 <아Q정전>.

내가 사는 집 근처에 루쉰 고거가 있기 때문일까. 유명한 이웃 사촌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곧 작가 루쉰의 삶과 <아Q정전>의 진수를 알게 되었는데, 민족혼을 깨우친 작가로 불리는 루쉰이 소설 속에서 대중에게 전하고자 했던 경각심은 최근 사회적 갈등이 심한 한국의 상황에도 의미있게 느껴졌다.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루쉰은, 중국인 처형 영상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분노하여 자퇴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문필활동과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루쉰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Q라는 자의 정전을 통해, 대국의 헛된 우월의식에만 사로잡혀 스스로를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망해가는 20세기 초 낡은 중국인의 모습을 그렸다.

자신의 무능함과 오만함,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정신승리법'을 터득해 자기 스스로 납득시키길 반복하는 자. 낡은 기준과 자기 확신에 빠져, 자기와 다른 것은 무조건 배척하는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늘 머리를 조아리지만, 그 와중에 자존심은 또 강해서 객관적 패배를 심리적 승리로 바꿔버리는 아Q. 그를 보며 지금 한국 사회의 낡은 기득권들이 떠올랐다면 너무 비약인 걸까.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무심한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봐왔나. 소심한 완벽주의자인 나는, 자기 확신과는 거리가 먼 ‘결정장애’자로 지금껏 살아왔다. 원하는 물건을 살 때조차 기쁜 마음은 잠시뿐, 곧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찾아온다. 그러니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도 어렵고, 어떤 생각을 쥐는 것도 어렵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덕분에 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이 된듯하지만, 사실 먼발치서 무대를 바라보며 갈망과 포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삶이기도 했다.

정당한 소망. 내가 살고 싶은 나라에 대해 생각하고, 정당하게 소망할 수 있는 행운. 루쉰이 안타까워한 청나라 말기의 세상은, 운명을 자기 힘으로 결정할 생각도 의지도 없는 이들이 어떻게 망하는지도 모른 채 망해가는 세상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세상을 분명히 선언하겠다는 용기를 낸다. 항상 무대 밖에 있었던 나는 여전히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색하지만, 나도 내가 원하는 무대에서 움직이고, 노래하고, 춤출 자격이 있으므로. 내 삶을 그저 시류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두지는 않겠다는 정당한 소망으로 꼭 투표하려 한다. 모두 투표하시길.  

상상(sangsang.story@outl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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