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대전(官渡大战)200년관도대전은 적벽대전, 이릉대전과 함께 삼국시대의 흐름을 결정한 중요한 전투이다. 관도(官渡)는 오늘날 허난성(河南省)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조(曹操)와 원소(袁绍)가 이곳에서 벌인 큰 전투가 바로 관도대전이다.
관도대전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조조는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고 반면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원소는 패망하게 되었다.
199년 유비가 서주(徐州)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조조는 원소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이듬해 유비를 격파하고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다. 관우는 유비와 헤어져 조조의 객장으로 지내게 된다.
원소는 이때에야 비로소 결전을 선포한다. 그러나 본거지를 지키면서 지구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을 듣지 않고 다음해 2월 안량(顔良)을 파견해 백마(白马, 현재 황하 남쪽 강변)의 조조군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안량은 조조 측 선봉으로 출전한 관우에 의해 단칼에 베이고 백마에서의 조조군의 포위는 풀린다. 그 후 원소는 무장 문추(文醜)을 보내 조조군을 공격하게 했으나 그 또한 관우에게 죽는다.
이때 원소는 70만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지구전이 유리했으나 원소는 대병력을 바탕으로 동서 수십리에 걸쳐 진을 구축하고 서서히 전진하는 전술로 조조의 진영을 압박했다. 조조 진영의 식량이 줄고 지구전 양상을 띄기 시작하자 조조는 철수를 생각했으나 그의 책사 순욱은 기회를 노리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원소 진영에는 허유(许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가족이 죄를 범해 원소에 의해 처형되고 허유는 조조에 투항한다. 허유는 오소(乌巢)에 주둔한 순우경(淳于琼)의 원소군을 기습할 것을 조조에게 진언하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군은 순우경의 군량 경비군을 섬멸한다.
이 소식을 접한 원소군은 혼란에 빠지고 내부에는 조조의 진영을 공격하자는 주장과 순우경을 구원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원소는 양쪽 모두를 채용하는 행동으로 인해 구원부대는 섬멸당하고 조조본진 공격부대는 오히려 조조에 귀순하는 결과를 초래, 결국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은 대패하고 만다.
관도 대전의 패배 후 원소는 여러 차례 조조와 맞서나 수차례 패하고 그 충격으로 병에 걸려 병사한다. 원소 사후 후계자 문제로 아들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결국 조조에 의해 패망하고 조조는 최대의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적벽대전(赤壁大战)208년208년에 후베이성(湖北省) 쟈위현(嘉鱼县) 북동, 양쯔강(扬子江)남안에 있는 적벽에서 한 유명 전투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와 제갈량이 두 나라의 군대를 지도했다고 나오지만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외교관으로만 활약했을 뿐 군사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원소를 무찌르고 화북(华北)을 평정한 조조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 적벽에서 손권(孙权)·유비의 5만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조조군은 적벽 반대편에 영채를 세우고 주유와 한 고향사람인 장간을 오나라에 보내 주유의 항복을 끌어내려 하나, 이를 간파한 주유에 오히려 역이용당한다. 주유는 일부러 태사자(太史慈)에게 전쟁이야기를 꺼내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고 술에 취해 자는 척한다. 장간은 주유가 자고 있을 때 채모(蔡瑁)와 장윤(张允)이 주유와 내통하고 있는 가짜 편지를 발견하고 그 편지를 가지고 도망간다. 그걸 본 조조는 대노하여 채모와 장윤의 목을 친다.
손권·유비 연합군은 계책을 써서 수전에 익숙치 못한 조조군에게 배와 배를 쇠사슬로 묶어두게 하는 연환계를 쓰고 동남풍을 빌어 조조군의 배를 불 태워버린다.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화북으로 퇴각한다.
그 결과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刑州,후베이성) 땅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릉대전(夷陵之战)222년이릉대전은 222년 촉 나라의 유비가 관우, 장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 나라 손권을 공격한 전투이다. 결과적으로 유비는 대패하고 그 이듬해인 223년에 사망했다.
219년 관우가 손권에 잡혀 처형되자 유비는 복수를 하기 위해 221년에 오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선봉으로 세운 장비가 그의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유비는 10만의 군사를 일으켜 관우와 장비의 아들 관흥(关兴)과 장포(张苞)를 선봉으로 세우고 공격한다. 첫 싸움에서 관흥과 장포가 용맹을 떨쳐 승전하고 그 뒤 오호대장군 중 한명인 노장 황충(黄忠)이 나가서 수많은 적들을 무찌르지만 전투 중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유비의 원한은 더욱 커져 오나라 땅으로 진격한다.
촉군은 오군을 이릉성까지 몰아가고 여름 더위를 피해 물가에 700리에 걸쳐 영채를 세우는데 이것이 그만 치명적인 실수가 된다. 오나라의 전략가 육손(陆逊)은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 촉군은 흩어져 있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유비는 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나 조운의 활약으로 구출되지만 이 전투에서 촉의 10만 군사는 거의 전멸하다 싶이 하고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한다.
이 전쟁의 패배로 촉군은 점령했던 형주 등의 땅을 오에게 다시 내주고 유비는 패배의 충격으로 백제성에서 223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