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귀의 사회 문화 심리학 칼럼]
기억
과거 우리는 두뇌가 낮은 사람을 일컫어 ‘새대가리’라고 비하하곤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서도 그런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다.
과거 새는 포유류보다 낮은 두뇌를 가진 동물로 인식되어왔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된 오늘날 그러한 사실은 전혀 근거 없는 사실 무근으로 간주되어진다. 오히려 그런 새의 지능을 알고자 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사실 생존에 있어 새는 인간 보다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새들은 실제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수천 가지의 씨앗과 먹이감들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인간들이 보기엔 환상적인 기억능력이다.
아마도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기억이라는 개념을 새들에게 적용하기는 적합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마치 열 센서에 반응하여 자동으로 열리는 자동문과 같이 그 어떤 감각에 가깝다. 이른바 기억 하는 게 아니라 반응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인간들 대부분은 그 어떤 고정된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습득되고 고정되기 마련이다.
그것을 이른바 ‘사회적 표상’이라 부르며 그것은 그 어떤 특정한 교육 없이도 자동적으로 유전된다.
즉 우리가 그토록 슬퍼하고 분노하고 판단하는 생각의 근간이 나 자신이 아니라 사회가 주어진 생각을 그저 따르고만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를 주검으로 몰 고갈만큼 슬픈 생각들, 그리고 행복감에 도취되어 평생에 몸 바친 내 생각들이 나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결국 내가 속한 사회의 생각들이었다니… 참으로 허탈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이다.
실제로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새들이 가진 감각보다 새로운 것에 반응하기에는 참으로 불리하기 그지없으며 편협 하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기억할 때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는가?
당신은 어린 시절에 대한 당신의 무엇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 당시 당신의 친구들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는가?
당신이 가장 즐거웠던 순간 이 무엇이며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무엇인지 지금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리고 만일 과거 당신이 그 어떤 사람으로 인해 곤란 했던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한 무엇을 기억하는가?
흥미롭게도 서구인의 대부분은 그 사람이 발생시킨 ‘일에 대한 원인’을 중시 여기며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금 그것의 결과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분히 인과적인 생각방식 이다. 그것이 결국 과학적 사고라고 우리는 이야기 한다.
그리고 중국인은 그 사람과 나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한 ‘상황 자체’를 중시하며 기억한다. 그래서 다시금 그런 상황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분히 실존주의적 사고 방식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우리는 그 결과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한 판결’을 한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런 사람을 상종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중국인이나 서구인들은 이혼하거나 헤어진 연인도 친구처럼 종종 자주 잘 만난다. 하지만 한국인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 일을 통해 이미 판결을 종결 지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인은 친구가 될 때 ‘나와 비슷한 사상’을 중시 여긴다. 그래서 ‘이념’이란 것을 탄생시킨다.
중국인은 ‘나와 같은 목적’을 중시 여긴다. 그래서 ‘관시(关系)’를 만들어낸다.
한국인은? 우리는 그 사람과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친구가 된다. 그래서 ‘정(清)’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어 ‘내편’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내편으로 되지 않을 땐 한국 사람은 무진장 섭섭해한다. 심지어 한국인의 80%이상은 ‘섭섭증’이라는 정신병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오죽하면 모 여류 소설가가 섭섭증이라는 것은 남이 원하는 것보다 내가 더 해주었을 때 생기는 화병이라고 정의를 내렸을까?
그리고 더욱더 위험 한 것은 그런 감정은 말하지 않아야 된다는 억압이 내재 되어있다. 그래서 자칫 근거 없는 배타심으로도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데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그런 근거 없는 배타심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예가 종종 있다.
마치 스스로 자해를 하는 꼴이다. 가해자 없는 피해자랄까? 이왕 중국에서 밥을 먹고 사는 상황이라면 중국인의 상법(想法)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지 아닐까?
필자 또한 중국에 와서 한국인이 지닌 그 깊은 기억의 골을 걷어내며 해방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놈의 섭섭증 중증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 친구가 말하길,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그 놈의 상황 때문이었기 때문에.
김 승 귀 : 사회 문화 심리학자 / 건축비평가
한국에서는 한의학을, 오사카, 미국(플로리다 템파), 런던 등지에서 미술, 디자인, 건축학 등을 수학. 2000년 한국으로 귀국. 도시건축평론가로 활동했으며, 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디렉터 교수, 경원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를 지냈다. 홍익, 중앙, 동덕 대학원 등 여러 국내 대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각종 국제 학회 논문편집장, 각종 전문 저널 편집장, 편집위원 등을 거쳐 2005년에는 도시매거진 '시티몽키'을 창간. 한때 상하이저널에서 건축평론 칼럼을 연재 한적도 있다. 3년간 중국전역을 떠돌면서 중국 사회심리학을 공부했고, 현재는 전공을 다시 바꿔 런던대학교 와 함께 '현대 중국 사회심리학 비교 연구'를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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