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귀의 건축 이야기]
상하이 미래 건축의 모양
예로부터 인간들이 인종차별을 해온 데에는 문화적 배타성도 내포돼 있지만, 우선 나와 ‘모양’이 다르다는 인식도 그 배경에 깔려있다. 눈이 2만개에 달하는 잠자리의 경우 수컷에 암컷의 색을 바르면 그 수컷을 암컷으로 착각하고 교미를 시도한다고 한다. 인간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인간 또한 다분히 시각적인 동물이다. 데카르트도 결국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무엇을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던가? 건축의 모양이 끼치는 문화적인 영향들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그 문화적인 가치를 점령하는 데에 막대한 힘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고급과 저급, 세련과 촌스러움, 이국적인 것과 평범한 것 등등 우리가 선별하고 있는 감각적인 가치 판단기준에는 반드시 시각의 범례가 있고 그곳에는 항상 건축의 모양이 함께 자리해있다.
요즘 생태적인 건축이 미래를 지향하는 건축이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서양의 SF영화에 나오는 우주선 모양을 꽤 닮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분히 화려함으로 치장된 서양의 ‘모양’이다. 반드시 그 모양을 갖춰야만 생태적 기능이 충족되는 걸까? 상하이 안팅(安停)에 세워진 독일식 에너지 생태적인 주거단지의 모양과 색에도, 그리고 수소전지로 가는 차의 모양에도 서양인이 그리는 미래의 모양이 어김없이 담겨 있다. 그 모양에 대해 우리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그것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미래의 세련된 시각적 가치로 받아들인다. 여태껏 간직해온 시각의 판단가치를 버리는 순간이다.
서양인들은 생태적인 친환경 요소를 미래로 보고, 동양은 그것을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로 보고 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유의 차이이다. 그리고 서양이 제안하는 그것의 ‘모양’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동양의 정신적 사유까지도 진부한 ‘모양’으로 치부하는 시각적 판단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상하이 다륜로(多伦路)에는 1928년 건립된 상하이 최초의 기와집 성당이 있다. 하나님이 중국에 더욱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일본건축가 안도는 ‘물의 교회’를 만들어 하나님이 교회 종탑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깊고 낮은 물에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서양인들은 그 동안 망각했던 또 다른 하나님의 존재감을 깨닫고 그를 일약 유명한 건축가로 인정하여주기에 이른다.
이처럼 건축의 모양은 우리의 시각적 판단과 생각을 획일화 할 수도 있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상상력을 지배하는 힘. 당장은 아닐지라도 곧 다른 형태의 문화적 파시즘을 일으킬 수 있다. 서양의 옷들이 가장 고급스럽고 세련된 것이라 여기는 시각적 선택과 판단에 우리는 옷을 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춘다. 그것을 위해 몸에 칼도 대고 밥도 굶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남의 눈을 이식 받고 있지만 그것이 남의 눈 인줄도 모른다.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말하기를, 가장 강력한 문화적 파시즘이 시각의 지배란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강력해 극복할 방법이 없단다. 그래서 최소한 알고만 있자고 한다. 이 눈이 남의 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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