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칭링능원(宋庆龄陵园)은 쑨원의 부인 송칭링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송칭링은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했으나 생전 그녀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부모님 묘지가 있는 상하이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송칭링이 묻히면서 만국공동묘지(万国公墓)는 명칭이 송칭링능원으로 바뀌었다.
송칭링 능원의 넓이는 대략 12만㎡으로 크게 쑹칭링(宋庆龄)의 메인 묘지와 백색의 쑹칭링 조각상, 쑹칭링의 인생을 그린 박물관, 중국 명인들의 묘지구역, 외국인 묘지구역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외국인 묘지 구역에 한글로 이름이 기록된 일제 시대에 목숨을 바쳤던 대한민국 독립투사들의 영혼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선생을 비롯해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등 독립운동가 19인의 무덤이 있다.
이 가운데 위치가 확인 된 것은 단 7개뿐으로 나머지는 어디에 묻혀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확인 가능했던 무덤 7구는 한국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초석만이 남아 후손들의 방문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안태국, 박은식, 김인전, 신규식, 노백린 그리고 이름도 남기지 못했던 독립열사들까지, 우리의 역사상 불행한 시대에 의로운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이름, 어려운 역경으로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영문 이름 속에서 꿋꿋하게 그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독립열사의 혼이 살아있는 송칭링 능원은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구베이 지역과 가까워 주말을 이용해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본다면 살아있는 역사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주소: 上海 陵园路 21号
▶개관시간: 08:30~17:00
안태국(安泰國, 1880∼1920)
평안남도 평양 출생. 독립운동가. 을사조약 후에는 실업구국운동에 종사했으며, 이승훈(李昇薰)• 최응두(崔應斗)등과 함께 상민공동회(商民共同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남도 총감(總監)이 되고 신민회의 최고위 간부가 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신민회가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나 독립군기지 창건의 준비사업을 하는 중에 일제는 간도(間島)에 독립군기지를 설치하는 운동을 벌리는 자들을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묶어서 신민회 중앙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으며, 안태국도 1911년 1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일제는 다시 신민회를 해체시키고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명을 일거에 검거한 다음 복역 중인 안태국을 재기소하였다. 그는 공소심에서는 징역 6년의 언도를 받고 동지들과 함께 5년의 옥고를 치렀다.
1916년에 출옥하자 바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문제를 임시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상해로 갔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1920년 4월 11일 상해 홍십자 병원에서 서거하였다.
박은식 [朴殷植, 1859~1925]
한말의 민족사학자•독립운동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활동을 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규식 [申圭植, 1879~1922]
청주(淸州) 출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구한말 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을 강제 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해로 망명,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2년 이후 동제사, 신한혁명당 등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주도하였고,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충청도 의원으로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법무총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21년에는 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으로서 손문의 광동정부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초기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다가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사후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봉환하였다.
노백린 [盧伯麟, 1875~1926]
황해도 은율(殷栗) 출생. 한말의 독립운동가.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광산(鑛山)•피혁상(皮革商) 등을 경영하였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朴容萬)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에 힘썼고,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總長)을 맡았다.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에 진력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한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인전 [金仁全, 1876~1923]
충남 서천 출생. 일제강점기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으며, 안창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를 조직하였다.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히고, 재무예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의정원 부의장도 지냈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에 임명되고, 1921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제4대 의장에 뽑혔다. 같은 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5월 사망하여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가, 1993년 8월 유해(遺骸)가 환국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등부 학생기자 구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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