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TV앞에 앉아 시간이 어찌 가는 줄 몰랐다. 말 한마디에 웃다가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 눈물 짓고… 나도 그들처럼 세월을 흥얼거리며 추억이 더 많은 올드팬이 되어 있다.
TV보다 라디오가 더 좋았던 시절. ‘별이 빛나는 밤에’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는데 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가 좋았다. 듣는 노래들도 내가 태어날 즈음 발표된 노래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리던 세시봉 멤버와 조동진을 포함한 쉘부르 멤버의 노래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라디오를 듣기 위해 밤10시를 기다리는 재미로 보낸다고 할 만큼 음악과 라디오사연이 너무나 재미있던 시절, 초등4학년 때였다.
그 즈음부터 라디오 공개방송이 생겼고, 조용필의 초창기팬클럽 문화가 만들어지고, 하이틴 가수가 처음 나오고,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직접 공테이프에 녹음하는 것도 유행이었다. 봄에 피는 목련도 그냥 목련이 아니고 ‘양희은의 하얀 목련’일만큼 통기타 노래에 푹 빠져있었다.
1981년에 컬러 TV가 나오면서 ‘TV가이드’라는 엽서크기의 방송연예 잡지가 나왔는데 창간호부터 매주 잡지를 사서 모았다. 신변잡기의 연예가 소식이 대부분이지만 세계명작다이제스트나 조영남의 ‘놀멘 놀멘’이라는 인생에세이는 정말 재밌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어린 딸이 참으로 딴 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 부모님은 한 번도 뭐라 하신 적이 없었다. 잡지를 비롯해 책이 쌓이고 쌓이자 정리 할 수 있는 책장을 아버지는 직접 만들어 주시면서 어린 딸의 취미생활을 예뻐하셨다.
다른 벽면을 차지한 LP판. 구하기 힘든 올드 팝송이 든 것부터 좋아하던 트윈폴리오, 송창식, 조영남, 조동진, 양희은, 이문세, 변진섭 등 다수의 LP판을 모으면서 부모님이 선물해주신 턴테이블로 밤을 지새우며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주말의 명화를 보던 시간들이 내가 보낸 10대 시절의 전부이다.
학창시절 방송반을 하며 꿈을 키우던 시절, 빨간딱지가 붙은 집안 물건들 사이에서 벽을 채우던 책들은 헌책방으로 가고 아끼던 백여장의 LP판들은 친한 지인들 집에 나눠 맡겼던 기억은 20년 전 일이 되었다. 어려웠던 시간,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가르치고 저녁이면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되어 누우면 옷에선 물감냄새와 함박스테이크 냄새가 섞여서 나곤 했다. ‘괜찬타괜찬타괜찬타… 수북이 내려오는 눈밭 속에서…’라는 서정주님의 시로 마음을 다독이며 세시봉의 착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노래로 노곤한 하루를 쉴 수 있었다. 더 이상 골라서 들을 LP판도 없고, 밤을 새서 읽을 책도 부족했지만 소형 카셋트에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음악에 의지해 돌아가던 시간들은 고맙기만 했다.
봄이 오면 꼭 들어오는 신청곡 중에 양희은의 하얀 목련이 있다. 라디오와 하루를 보내고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사연을 보내오고 음악을 신청해온다. 그렇게 라디오 부스에 앉아 사연에 공감하며 신청곡을 들려주던 내 인생의 세시봉, 가장 멋진 시간 또한 추억이 되었다.
▷Betty(fish7173.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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