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귀의 건축 이야기]
상하이 건축의 장소성 II
근대도시의 건축적 장소성의 대표적 특징은 산업화에 따른 구획화 그리고 전문화에 따른 분리현상을 들 수 있다. 즉, 특정 물건들을 파는 곳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이라든지, 결혼을 하는 곳, 전시를 하는 곳 등등 한 공간에 한가지만을 특정화하여 발전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는 사회적으로는 계층을 분리 시키거나, 도시적으로는 극심한 교통난을 부추기는 등 하나 둘씩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도시를 바라보는 시점을 관조적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예를 들어, 도시에 공원이 생겨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도시에 필요한 자연의 휴식공간이어야만 한다 것이라든지, 근대적 결혼식이란 게 바쁜 생활 속에 굳이 집으로 초청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얼마든지 식장을 예약해서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 우리 이제 부부 되었음을 약속하고 인정 받는 행위 등, 이른바, 과거 집에서 잔치도 하고 결혼도 했었던 그런 공간이 따로 분리화 되고 전문화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상하이에는 서울에 그렇게 많은 예식장을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고급 아파트 집 앞에서 리무진이 대기해있고 폭죽을 터뜨리는 그런 결혼식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시내 한복판의 공원에는 어김없이 식당들이 들어서있거나 심지어는 디스코텍, 혹은 룸살롱까지도 들어서있다.
이른바 서구에서의 공간적 질서관은 'Why' 즉, '왜'라는 '반드시 그래야만 되는 이유' 라는 합리성 대한 질서이지만, 여기는 오히려 'Why not' 즉, '이러면 아니 될게 뭐 있어' 라는 식의, 한층 더 감각적이며 원론적이다. 사실 자연을 보고 즐기라며 공원을 만들어 두지만 호루라기를 불러대도 사람들은 몰래 삼겹살을 구워 먹기 일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 상하이의 탈 합리적 공간 질서관이 훨씬 더 지속적이며 본질적 일수 있다. 실제로 요즘 서구에서도 그런 분리된 공간질서들을 다시 접목시키는 노력들이 한창이다. '퓨전'이라든지 '하이브리드' 라든지, 떨어뜨렸던 것을 다시 붙이느라 법석들이다.
가까운 예로, 비데기만 보더라도 처음에는 용변을 보는 것, 그리고 씻는 것으로 따로 분리해두었던 것을 용변을 보는 것에다 씻는 것을 합쳐놓은 일종의 하이브리드식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화 시키고 분리시켰던 것을 다시 이어 붙이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하지만 여기 상하이에는 애초부터 뒤섞여서 생성된 질서관이라 그런 노력은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즉, 질서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다 질서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과거 태국의 샴 왕국때 영국인이 소개한 근대 지도 때문에 국경선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도에 있는 국경선을 만들기 위해 50년을 넘게 전쟁을 벌렸다고 하니, 질서란 바로 그런 것이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질서는 반드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질서를 만들기 위해 또 다른 혼란을 겪는 것이다. 갤러리와 주거공간 사이에 매음굴이 번듯이 들어서있는 여기 상하이의 도시한 켠과 그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모텔 추방 캠페인의 목소리 속에 사는 서울의 생활. 과연 어느 곳이 더 행복한 도시인가?
(그림설명: 좌로부터 징안공원 내에 있는 인도네시아 식당, 인민공원 내에 있는 아랍식당 겸 나이트 클럽, 푸싱공원에 있는 park97 식당 나이트클럽, 아파트 상가단지에 있는 태국 갤러리와 매음 장소)
▷김승귀(건축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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