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이산' 정신으로 중국과 우호 맺어야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를 맺은 역사적인 날이다. 500여명이던 상하이 교민사회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7만 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변했다. 또한 LG, 현대, 삼성, 대우, SK 등 대기업 종합상사에서 파견된 직원 위주로 형성되었던 교민사회도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자영업자 등이 함께 어우러지며 학교, 학원, 슈퍼, 꽃집, 식당 등 다양한 종류의 직업군이 모인 자족 사회로 발전했다.
“수교 직후에는 중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선입관이 있어 상하이에 파견되는 것을 꺼려했다”는 교민 C씨는 “상하이에 나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지금 들으면 놀랍겠지만 당시엔 회사에서 오지수당을 줬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초기에 진출한 한국인이 가장 불편을 겪었던 것은 주거제한과 외국인 전용화폐 사용정책. 외국인은 외국인 주거 지역으로 지정된 곳에만 거주할 수 있어, 주거비용은 당시 물가를 비교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92년 당시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지정된 곳의 120~130㎡의 아파트가 최소 3000~5000달러, 1만 달러를 넘는 곳도 많았다는 증언이다.
게다가 위안화 기준 약 1.5배가 더 비싼 외국인 전용화폐를 써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비싼 만큼 특혜를 받는 곳도 많았다. 병원의 경우 외국인 전용 창구와 진료실이 있어 기다리지 않고 일사천리로 진찰과 처방을 받을 수 있었고, 관광지의 경우에도 별도의 전용문으로 입장하기도 했다.
수교 당시 상하이에 진출한 교민들이 주거지로 주로 선택한 곳은 시 중심가 지역인 포트만 호텔, 국무중심. 차츰 하미루 뤼구비에수(绿谷别墅), 홍차오루 롱바이까오지꿍위(龙柏高级公寓) 등으로 공항이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 지금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구베이 지역은 당시엔 논밭이었고 홍췐루 지역은 가구공장 지대였다.
수교전인 87년부터 중국 대륙을 누빈 이평세 상해한국상회 고문은 “상하이 사람은 자부심이 강한 반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없어 외국인이 살기에 편안한 도시다”며 “당시엔 거의 모든 중국인이 한국인을 처음 보는 사람이기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만큼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행동을 했다”고 전했다.
이어 “경제적, 지리적 조건에 의해 한국인은 앞으로도 중국에 필연적으로 진출 할 수 없다. 10년 20년 후의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현재 상하이에 거주하는 교민들은 중국인과의 교류를 통해 상부상조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때 반드시 교민과 중국동포가 한마음이 되어 함께 교류에 나서도록 하자”고 당부했다.
복단대유학생 1호 졸업생으로 현재 유니콘미싱(브라더) 상하이대표처 대표로 재직 중인 권국희 대표도 “여기 상하이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교민이나 유학생들은 차세대 후배들을 위해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여 후세들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중 우호관계를 다지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생활 속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상하이 한중 커플 1호인 황영씨는 “한국인들의 몸에 밴 공중도덕 실천 모습이나 연장자를 공경하는 모습은 중국인들이 감탄하며 호감을 갖게 되는 요소 중의 하나”라며 “자신이 만나는 중국인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전했다.
한중 20주년을 맞아 다음 20년을 바라보는 지금 한국 교민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나영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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