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영 기자와 함게 찾아나선 살아있는 역사기행
미래를 꿈꾼 세계인, 장보고
( A Cosmopolitan Dreaming of the future, Chang Po-Go)
장보고, 그는 우리 역사에서는 모반을 꿈꾸었던 반역자로,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인의의 덕을 지닌 천하의 영웅으로, 일본 승려 엔닌은 높은 인의(仁义)의 덕을 가진 인물로 또 주일미대사를 지낸 역사학자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는 해양상업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무역왕으로 장보고란 인물을 평가하고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는 필자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극과 극의 역사적 평가가 나올 수 있는이유는 무엇일까? 장보고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었던 필자는 중국 산동(山东)반도에 장보고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 삼국을 단일 경제권으로 만들었던 인물, 세라믹로드(Ceramic Road)를 동북아 해상네트워크와 연결함으로써 아시아를 넘어 동서양 문화교류에 이바지한 진정한 세계인,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은 여러 가지 책과 자료를 찾아보는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상하이에서 산동반도 웨이하이(威海)까지는 자동차로 11시간이나 걸리는 대장정이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라는 아빠의 비유는 숫자로 느껴지지 않는 거리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차안에서 자다깨기를 몇번이나 반복해도 그대로인 나무들과 논밭의 풍경은 중국이 거대하다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웨이하이에 도착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적산법화원이다. 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창건한 불교 사찰로 재당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사찰이다.
“오랫동안 높으신 인덕을 들어왔기에 흠모의 정은 날로 더해만 갑니다.”
이는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구법활동을 펼친 일본스님 옌닌도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남긴 감사와 존경의 기록이다. 연간 쌀 500섬을 수확하고 스님 30명이 머무르고 있던 법화원은 당대의 큰 사찰이었다. 적산법화원에 들어서는 순간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것 같았다. 집회를 하고 순조로운 항해를 기원하던 신라인들은 고향과 같은 곳이 있어 마음 한켠이 얼마나 편안했을까?
법화원을 나와 필자는 발걸음을 장보고 기념탑으로 향했다. 1994년 법화원 북쪽에 장보고 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장보고 탑은 총 360억위엔을 들여 건설했다고 한다. 탑 중간에 써있는 ‘장보고기념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필체에서 그가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기둥은 각각 한국과 중국을 뜻하고 가운데의 고리를 통해 한•중 양국의 우호와 교류를 기념하기 위한것이라고 한다.
장보고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장보고 동상이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불끈 쥔 주먹, 큰 칼을 차고 황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장보고 동상은 위풍당당했다. 장보고가 군인으로 보낸 세월보다 무역왕으로 보낸 세월이 훨씬 많다는것을 생각해본다면 별로 걸맞지는 않지만 중국땅에 우리 조상의 동상이 서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자랑스러웠다.
동상을 지나 전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1전시실에는장보고와 정년의 어린시절과 입당배경에 대한 기록들과 자료들이 있었는데 필자의 눈에 띈 것은 밀랍으로 복원해놓은 장보고와 정년의 모형들이었다. 거구의 몸집과 결의에 찬 눈빛은 장보고와 정년의 굳은 각오를 보여주는듯 했다.
제2전시실에는 장보고의 무녕군 소장으로의 활약이 전시돼 있었는데 먼 이국땅인 당나라에서 무예로 성공한 장보고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한 후의 모습을 본떠 만든 밀랍인형에서는 장보고의 출중한 무예와 용맹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제 3전시실에는 장보고의 불교 업적이 전시돼 있었는데 법화원의 설립배경, 천수관음보살상 등의 불교 유물들, 옌닌에 대한 그림들이 나열돼 있었다. 군인으로서 용맹을 떨치던 장보고와 불교와 평화를 중시하던 장보고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제 4전시실로 향해 청해진에 대한 유물들과 자료들을 보았는데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그 당시 쓰이던 배의 모형이었다. 나무배로 위험한 황해를 자기집 앞마당 거닐듯이 넘어다녔던 장보고 선단의 기술이 대단하다는것을 실감했다.
‘지금 한국의 뛰어난 조선기술도 우리 조상의 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기념관을 나와 적산명신상으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보였던 적삭명신을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어마어마했다. 높이가 58.8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거대한 좌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예전부터 사람들이 순조로운 항해를 기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행 전 조사한 신문기사에서는 옌닌의 기록을 근거로 적산명신이 장보고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했고 최인호의 ‘다큐로망 장보고’에서도 일본 적산명신 초상의 활(弓) 과 신라의 관(冠), 보배 보(宝)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장보고가 적산명신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산명신을 보러 올라가는 도중 중국 여행단의 가이드가 하는 말은 필자가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었다. 중국 검색사이트인 Baidu 백과사전에서 확인해보니 적산명신은 진시황 시절부터 있었고 장보고는 적산에 왔을 때부터 적산명신이 보호해주어 덕을 본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같은 적산명신상을 보고도 중국사람은 중국의 적산명신으로, 우리는 장보고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앞으로 여행을 다니면서도 한국측, 중국측 양쪽 자료 모두 조사 비교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적 큰 꿈을 가지고 당나라로 건너간 장보고의 개척정신, 당나라로 팔려온 노예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신라로 귀국해 해적들을 소탕한 장보고의 인의 정신, 해상무역을 통해 나라를 위하고 큰 세계를 바라본 장보고의 애국심과 비전을 생각해본다.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장보고의 위대한 업적들을 둘러보니 가슴의 감동이 가시질 않는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한중일의 무역을 장악한 장보고는 비전과 세계화된 정신을 가진 좋은 예이다.
1200년 전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장보고가 필자에게 묻는 듯 하다.
“아프리카, 남극, 우주……네가 개척해 나가야 할 청해진은 어디인가?”라고!
우리는 세계 무대에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우뚝 설 수 있도록 장보고 정신을 계승하는 21세기 한국인이 되어 보자.
[상하이에듀뉴스/양근영 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