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알아야 할 중국 근현대 문학가 ⑤]
시(诗)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시인 아이칭(艾青)
“나의 인생은 역경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은 전혀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시종일관 국민과 함께 해왔습니다. 인류의 심령 속에 자유에 대한 갈망과 신념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이백과 두보를 잇는 중국 근현대 시인 아이칭(艾青)
중국 최고의 고전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들 수 있다면, 근대 시인에는 아이칭(艾青)이 있다. ‘중국어를 미술적이며 음악적으로 예술화한 개척자’라는 수식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이칭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근대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다옌허 (大堰河), 북방(北方), 개척자의 노래, 나는 이 땅을 사랑한다(我爱这个地), 붉은 깃발(红旗)등이 손꼽힌다. 그는 1960-70년대 공산주의 체제와 같은 정치 사상간의 갈등으로 인해 안정되지 못한 중국의 분위기 속에서 움츠리기 보다는 오히려 시로 시대의 상황과 그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그의 우수작들은 모두 그 시대의 현실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아이칭은 중국의 정치와 사상 그리고 문학의 산 증인이며 20세기 중국의 침체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견뎌낸 시인이다.
그의 화려함 뒤에는 암울하고 억압된 시대의 아픔과 감춰진 고통이 예술적으로 표현된다. 아이칭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불합리함을 고발하기도 하고 희망과 자유를 노래하기도 한다. 또, 그는 단순히 시를 글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시의 각 장면들을 색감 있는 그림처럼 생생하게 나타냈다. 과연 아이칭은 어떻게 시를 ‘그리게’ 된 것일까.
반(反)파시즘 시인으로 데뷔, 감옥 속에서도 꽃 피운 시의 열정
1910년 저장성(浙江省)에서 태어난 아이칭은 항저우 예술전문학교에서 회화공부를 한 뒤, 교장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18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시절 알게 된 벨기에 시인 베르하렌은 그가 시에 빠져들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또 그 때 한 미술공부는 그의 시작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2년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 아이칭은 반(反)파시즘 시인으로 데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국민당에 반대하고 좌익 작가 연맹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한 열정은 수감 중에도 식지 않았다. 아이칭은 어두운 감옥 속에서도 베르하렌의 여러 작품을 번역했으며 첫 번째 시이자 대표작인 ‘다옌허-나의 보모’(大堰河-我的保姆)를 완성했다. 작품 속에서 아이칭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웠던 유모 다옌허의 비참함과 가난함을 서술하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과 봉건 사회의 수탈을 비판하고 있다.
아이칭은 출소한 후에도 민중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일어난 항일 전쟁과 세계2차 대전으로 중국 땅은 점점 황폐해져 갔고 사람들의 삶 또한 더욱 힘겨워졌다. 아이칭은 중국 각지를 방랑하고 돌아다니며 민중의 반발과 고통을 시 안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또 ‘나는 이 땅을 사랑한다(我爱这个地)’와 같은 시들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려 했다.
아이칭의 시에는 민족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그의 곧은 성격도 드러나 있다. 초기에는 국민당에 반대하는 좌우파로 체포되었고, 1957년에는 반 우파 운동에 참여함으로, 1960-70년대에는 문화혁명으로 오랜 숙청생활과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아이칭은 자신의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의 강한 정치적 의지는 아이칭(艾青)이라는 필명에도 나타나있다.
아이칭의 본명은 장하이청(蒋海澄)이었지만 그의 성인 ‘장(蒋)’이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蒋介石)와 같다는 이유로 “艹”만 남겨두고 반대한다는 의미로 “X”를 더한 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칭은 6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후회 없이 걸어왔다. 그는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몇 년 뒤 왼쪽 눈 마저 시력이 감퇴되어 희미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를 통해 당시 중국 사람들은 희망과 꿈을 되찾았고 그의 비판으로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인생은 역경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은 전혀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시종일관 국민과 함께 해왔습니다. 인류의 심령 속에 자유에 대한 갈망과 신념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그림 같은 시는 강한 신념과 의지, 자유의 대한 갈망과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고등부 학생기자 배아현(상해한국학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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