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에게서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외환선 도로 분리대 위에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보이는 새끼 고양이가 떨며 앉아 있더란다. 그런 장소에 어떻게 고양이가 있을까 이상하기도 하고 불쌍해서 차를 세울까 순간 망설이다 그냥 지나쳤는데 이틀 후 그 길을 지나며 도로 한 가운데 완전 종잇장처럼 납작 엎드러진 흔적을 발견했다는. 고양이를 딸처럼 키우기도 했던 친구는 한동안 그 고양이를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사실인지 어떤지 요즘 중국 청소년들 가운데 이렇게 새끼 동물들을 일부러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장난처럼 유행하고 있다고도 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물고기 입에 담배 물리기, 절벽 위에서 먹이로 다람쥐를 유인한 후 발로 걷어차 아래로 떨어뜨리기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도 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이리 잔인한 걸까.
사실 나도 고백할 것이 있다. 아마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여름철 복숭아를 먹다 애벌레를 발견하면 징그러워 몸서리를 쳤는데 그냥 버리든지 안 먹으면 될 것을 꿈틀 머리를 내미는 그 녀석들 위로 촛농을 떨어뜨리면서 그 징그러움에 은근히 복수를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상하이로 온 후 어느 해 여름엔 지독한 모기들에 짜증이 나던 차에 마침 생포한 모기를 손 끝으로 잡고 다리를 하나씩 떼어낸 적도 있다. 혹시 나를 사이코 패스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 따뜻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대인관계에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동들은 나의 내면에 잠재된 분노의 감정이 투사된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쌓인 분노를 전혀 엉뚱한 대상에게 풀어낸다는 데 있다.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약한 존재여서 대항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찰스 패더슨의 <동물 홀로코스트>(휴 출판사)는 특히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 구조와 잔인함, 산업화된 도살이 인간 사회의 착취문화와 폭력, 인간성의 상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닭의 자연 수명은 15~20년인데 영계들은 보통 7주 만에, 돼지나 양은 몸집만 불리다 5~7개월이면 도축된다고 한다. 식육용 송아지는 불과 4개월 만에 우리를 떠나게 되는데 제 발로 처음 걷는 그 걸음이 바로 도살장으로 향하는 것이라니 가슴이 먹먹해온다.
하지만 패더슨은 단순히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다름없이 동물들에 가해지는 인간의 잔인함 속에 나타나는 잔학성, 특히 약자에 대한 폭력, 착취의 본성을 폭로한다. 그는 말한다. “동물에게 모든 인간은 나치다”라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보다 약한 것에게 모든 인간은 나치다”일 것이다. 과연 인간은 이 잔인한 유희를 멈출 수 있을까? 분노를 더 약한 무엇인가에 쏟아내는 일을 멈추고,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작고 연약한 모든 생명에 연민을 품는 것, 이것이 바로 패더슨이 말하는 인간성의 회복이 아닐까 싶다.
▷구름에 실린 달팽이(geon9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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