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막내가 하루는 시무룩하게 묻는다.
“엄마는 저랑 몇 살까지 같이 사실 수 있어요?”
이 아이가 갑자기 왜 그러나 싶은데...... 여섯 살, 네 살 터울의 오빠, 언니에 비해 자기는 6년, 4년 아빠, 엄마랑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고 억울했나 보다. 아빠, 엄마가 자신의 인생의 구심점인 시기니 문득 그 또래의 아이다운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 듯 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 친정 엄마가 떠올랐다.
70대 중반을 바라보시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며, 내 나이와 비교해 주었다. 막내가 지금의 엄마 나이가 될 때, 엄마도 외할머니처럼 막내의 아들, 딸을 지켜 보며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야기 하니 얼굴이 점점 밝아진다. 어린 마음에도 그 정도면 안심이 되나보다.
한 세대의 주기를 보통 33년으로 잡는다. 큰 아이와 나의 나이차가 딱 30년이다. 큰 아이는 2000을 전후로 하여 자신의 세대를 시작하고 살아가고 있다. 큰 아이가 태어나 자라기 전 30년 남짓, 내가 살아냈던 세대를 그 아이는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나의 뇌리엔 여러 기억들이 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이 있었고, 마을 통틀어 이장 아저씨 집에 전화가 설치되고, 우물에서 물 긷던 시절을 거쳐 마을에 상수도 시설이 들어오던 시간들이 있었다. 큰 아이는 본인은 경험하지 못한 엄마의 시대 이야기들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도 궁금해 하고 듣고 싶어 했다.
세월이 나의 세대에서 나의 아이들의 세대로 흘러가는 게 맞나 보다. 한국사를 배우던 큰 아이가 선생님께서 부모님의 시대,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이야기를 들어 보라 하셨나 보다. 들어 보니 우리 때와는 달리 요즘 한국사는 고대사보다 근현대사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나 보다. 처음엔 귀찮기도 하고 뭐 할 말 있을까 싶어 1-20분 이야기 할 요량으로 뭐가 궁금한지 그냥 물어 봤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묻는다. 다행히도 나의 세대를 살며 내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배웠던 시기가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역사관을 접하는 것을 보며 다행이다 싶다. 문득 나 또한 어릴 적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와 많지 않은 대화지만 아버지 시대 이야기를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어린 시절의 일제 시절의 기억들, 해방의 기억들, 그리고 내가 어려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역사의 이슈보다도 아버지 인생의 희노애락이 녹아 든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너무 어렸음에도 내 집 앞을 머리띠를 질끈 매고 지나가던 역전 마라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본격적으로 내가 태어나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로 접어드니 짧게 끝나리라 여겼던 이야기가 무한정 길어지게 되었다. 이쯤 되니 나와 같은 시대를 함께 한 남편도 이야기에 합류했다.
학력고사 세대인 우리 시대엔 다양성이 많지 않았다. 한국사를 통째로 외웠던 기억들에 아이가 이미 고인이 된 유명인들의 역사적 해석과 업적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어 할 때 먼저 정말 이것이 필요한 대화인가? 시험에 나오나? 속으로 되묻는 나를 보게 되었다. 불혹인 40대에 접어 든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 세월의 연륜이 함께 한 나의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해석을 자녀와 나누는 시간이 의외로 신선했다. 30년 후 이 아이가 그 다음 세대인 자신의 자녀들과 우리 시대와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이야기 하겠구나 싶으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 때 이 아이도 바로 오늘을 기억하겠구나 싶다. 나의 세대의 이야기가 이렇게 내 아이의 삶이 되는 걸 바라보는 시간. 부모의 시대 이야기를 들어 보라 숙제를 툭 던져 주신 선생님 덕에 내 기억 속의 나의 부모님의 세대 이야기와 함께 3세대가 한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나의 자녀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세월이 앞장 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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