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주미일본대사관 홈페이지에 게재된 홍보 영상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해당 영상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괄목할만한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은 일본이 기여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주장이 핵심 요지를 이루고 있다. 얼마 후면 일본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연설이 예정되어 있는 관계로, 최근 국제사회에는 일본이 당분간 역사논쟁을 피하고, 관련하여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할 언행을 자제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이번 홍보 영상을 계기로 한일 간 혹은 중일 간에 집중되던 역사논쟁이 아시아 전체 지역으로 확산되는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00년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근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어떤 말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번영, 그리고 상처가 혼재한 복잡다난한 시간이었다. 일본의 지적처럼 일본의 경제재건과 연관된 아시아의 긍정적인 경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난 세기 아시아의 현대사에는 평화와 번영의 기억만큼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에 의한 상처와 아픔 또한 매우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하고 싶은 사실만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대하는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설사 영상 자료의 설명처럼 일본의 신속한 경제재건이 아시아 평화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논리라면, 탈냉전적 변화를 두려워한 북한이 90년도 전후 1차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핵개발에 대한 관심을 대폭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핵문제는 이라크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문제가 된 홍보 영상에는 이제는 세계 철강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포스코, 그리고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장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과거 한국의 중화학 공업 발전에 일본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과거 지하철 개통에 일본의 기술이 도입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소 비약적으로 얘기해서, 현재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과학의 아버지 뉴튼과 발명의 아버지 에디슨 덕분에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이치는 서로 보이지 않게 무수히 다양한 인과관계 속에 얽혀있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산업화의 길을 빨리 걸은 일본이라는 아시아의 이웃을 어떻게 활용하고 또 어떻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운명이고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일본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는 이웃나라로 지내고 싶은 심정이다.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견인하는 기둥 역할을 함께 담당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사실 전세계 어느 곳을 둘러봐도 국경을 맞댄 나라들끼리 서로 사이가 좋은 경우보다는 사이가 좋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이 세 나라가 유럽통합의 주역으로 유럽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주도하게 된 데에도 수 백년이 걸렸다. 이미 오래 전에 일본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세계관과 역사관의 차원에서도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보편타당한 눈높이를 가져주길 다시 한 번 당부해 본다.
▷박인휘(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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