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의 나의 중국 유학은 밀레니엄을 눈 앞에 두고 유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애초 계획했던 중국어가 신의 경지엔 접근도 못한 채, 신나고 즐겁기만 했던 학창시절이 끝났다. 그 때 내가 좀 더 성숙했더라면, 그 때 내가 좀 더 치열하게 공부했더라면, 그 때 내가 좀 더 똑똑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출중한 중국어 실력을 갖췄을 텐테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많이 남는다.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중국어에 관심이 있어 공부하러 온 유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단지 학비가 좀 싸고 한국과 가깝다는 이유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들 눈엔 나 같이 중국이 좋아서 온 사람이 희한하게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학교에선 외국 유학생들을 위해 태극권 장권 등 중국 고유 무술이나 악기반을 운영했지만, 태극권 신청자는 몇 백명 되는 한국유학생 중에 언제나 나 혼자였다. 비단 베이징에서 만이 아니다. 선전(深圳)에서도 산동에서도 이런 문화수업을 듣는 한국 유학생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 그래서 난 이런 문화 수업에서 항상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유학생반이니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영어나 일어만 할 뿐 중국어 조차도 안하신다. 한국어는 바라지도 않지만 최소한 중국어는 같이 해주셔야 되는 거 아닌가. 심지어 수업 시간과 장소가 변경이 되어도 나한테는 통보가 안 왔다. 혼자 텅 빈 체육관에 간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베이징서 만난 태극권 선생님은 국적은 안보시고 실력만 봐주셨다. 결국 난 체육대회 때 태극권 장권 시범에 나가게 됐고, 항상 서양학생이나 일본학생이 서던 맨 앞줄 가운데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또한 나 홀로 누렸다. 체육대회에 참가한 한국유학생은 나 하나였기에.
한국학생들 사이에선 상당히 적극적이고, 좀 독특한 인물로 찍힌 내가 3학년이 끝나갈 무렵 생애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학창시절 당시 퉁퉁한 몸매의 소유자였던 나는 남자들에게 퍽이나 인기가 없었다. 난 항상 이성에게 성격 좋다는 말을 들었고, 정말 내 성격이 좋아서 듣는 칭찬인줄 알았다. 그러다 갓 유학 온 한국남학생을 소개받았고,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국 여친 남친이 되었고,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내가 먼저 졸업을 하고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이 졸업해서 한국에 나와 직장을 얻고 결혼을 했다. 첫째가 태어나고 두 돌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상하이로 발령이 나서 먼저 들어가야 된다는 엄청나게 기쁜 소식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와우~ 상하이라고? 중국에 가서 산다고? 오예~~~”
첫째 아이 두 돌을 지내고 이틀 뒤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상하이에 들어왔다. 국제도시 상하이. 나와 같은 베이징파에겐 왠지 라이벌같은 상하이. 바다가 있다는 상하이. 살아보니 과장된 표현도 많았지만 그래도 상하이가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상하이 생활 2년차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둘째가 생겼다. 사실 미취학 아동에게 중국생활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고생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상하이에서 유모차 부대를 만나면 안쓰러운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두 아이에게 중국어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것에는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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