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개괄
장평 대전은 중국사나 춘추전국시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히 들어봤을 전투이다. 기원전 265년, 진나라는 한나라의 월경지이자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상당(上党)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전국 칠웅 중 최약소국이였던 한나라는 진나라 군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더군다나 본국과 떨어져 있던 상당의 함락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적 진나라에 항복하느니 함께 합종을 꾀하던 조나라 효성왕에 바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이는 독이 든 성배에 불과했다.
이를 들은 진나라 소양왕은 길길이 날뛰며 조나라에 공세를 퍼부었지만, 명장 염파는 지구전을 고집하며 도통 전투에 돌입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년 동안의 피 말리는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진나라 재상 범수는 조나라에 사람을 풀어 왕과 염파를 이간질시켰고, 결국 염파가 물러나고 백면서생에 불과한 조괄이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던 조괄은 곧 전투를 벌였으나, 불세출의 명장 백기의 계략에 말려들어 포위를 당하여 보급이 끊어져 입장이 뒤바뀐 것이다. 46일 후, 식량이 다 떨어진 조괄의 조나라 군은 포위를 뚫으려 최후의 일격을 날렸으나, 조괄은 그의 정예병을 이끌던 중 화살에 맞아 죽었고, 그의 40만 군세는 곧바로 항복한다. 그리고 바로 이 항복한 조나라 대군에 관한 백기의 처리가 논란의 중심이다.
40만 동원설과 매장설
백기의 40만 매장설에 관한 논란은 40만 동원설에 관한 논란과 맥락을 같이 한다. 40만 동원설에 관한 가장 큰 의문점은 아래와 같다.
‘기원전 3세기 조나라 인구는 대략 300~350만으로 추산되는데, 아무리 전군을 긁어모았다 해도 인구의 10%가 넘는 40만 대군의 수년간 운용이 고대사회의 행정체계에서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에 관한 반박의 중론은 아래와 같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것과는 별개로, 바로 시대가 그들에게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로의 진입과 함께 전쟁의 성질은 총력전으로 가변했고, 막바지로 치닫던 기원전 3세기의 실태는 총력전의 항시성이였는데, 이는 바로 중앙집권적 국가 하의 편호제민 제도의 극대화로부터 기원한다. 편호제민 제도하의 국가는 백성을 혈연을 기반으로 형성된 ‘호’라는 단위로 편제하여 다스렸고, 동원 또한 이 ‘호’에 대한 일정 비율의 무조건적인 차출로 이루어졌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나라의 필사적인 40만 대군 동원 또한 이 제도의 극한적 활용의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나라 군대가 항복했을 때, 백기의 진나라 군 또한 식량이 부족했기에 그들을 포로로서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다시 조나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법. 만약 40만 명이 정말 동원되었다면 그들 중 적어도 30만 명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전장 부근에서 발굴된 유골들이다. 이 유골들로 인하여 백기에 의한 조나라 군대의 매장은 확실시되었으나 그 수치와 방식에 관한 이의 제기는 지속되고 있다.
고등부 학생기자 강지우 (CIS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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