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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이야기] 할머니의 기일

[2017-04-13, 13:22:18] 상하이저널

지난해 94세를 일기로 작고하신 친할머니는 막내딸이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를 대신해서 9남 1녀를 혼자 힘으로 키우셨다. 10남매 중 다섯째인 우리 아버지는 어린 시절 소라도 끌고 집을 나가야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셨는데 이 한마디만 들어도 혼자서 정신 없이 아이들을 돌보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웠다고 회상되는 시절이라 해도 배움이 많지도 않았고 도움 받을 데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10남매를 키우고 결혼시켜 가정을 이루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하지만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매력적인 항상 활기가 넘치던 분이셨다.

 

작고하시기 전까지 21명의 손자손녀와 그들의 배우자들에게 해마다 손수 농사 지은 딸기를 보내주실 정도로 마지막까지 가족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다. 연로하셨지만 워낙 건강하고 정신이 맑으셔서 소천하시기 한달 전까지도 밝은 모습의 사진을 보내주셨었는데, 봄 꽃이 한참 예뻤던 작년 이맘때 갑자기 날아온 비보는 아직도 꿈인 듯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식이 많다 보니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시는 날은 일년에 며칠이 되지 않았다. 워낙 오래간만에 뵙다 보니 어린 동생들은 할머니가 낯설어 울음을 터뜨리거나 곁을 주지 않아 엄마가 많이 난감해 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할머니가 좋았다. 밤에 할머니 옆에 누워 아버지의 어린시절 얘기를 들었던 일, 목욕을 하고 나온 할머니가 참빗으로 긴 머리를 한 올 한 올 빗어 내리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할머니의 ‘타래과’인데 거실 한가운데 신문을 깔고 밀가루 폴폴 날려가며 할머니랑 둘이 반죽을 하고 있으면 낯을 가리던 동생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엄마 몰래 할머니 쌈짓돈으로 사주셨던 알사탕의 달콤함도 그립고,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셔서 두 손 꼭 잡으면서 해주셨던 말씀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마음 따뜻해지는 추억을 많이 남겨주고 가셨는데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게 두고두고 아쉽고 죄송하다.

 

청명절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태국여행을 다녀왔다. 큰 아이가 아홉 살이니 내가 할머니와 타래과를 빚던 딱 그 나이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온 공항, 리조트 로비, 발길과 눈길 닿는 거리 곳곳에 작년 시월에 서거한 태국국왕의 모습이 여러 가지 형태의 사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여행의 기쁨에 들 뜬 아홉 살 아이가 "저 아저씨는 누군데 가는데 마다 사진이랑 꽃이 있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추모열기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아직도 사원에는 검은 옷과 신발로 예를 표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조문이 이어지고 있는데 몸과 마음을 다해 추모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70년 재임을 마치고 서거한 이후에도 이토록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살아가면서 가족이나 친지가 아닌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조문행렬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마음속으로 국왕의 영면을 빌면서 나의 조국도 한번쯤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과 존경을 보낼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는 날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부터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보려고 한다.

 

보리수(nasamo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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