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챙기시던 어머니가 함께 넣어 보낸 빨간 원통 안에는 유치원 때부터 받은 각종 졸업장 상장 등이 두루마리처럼 말아 보관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한가한 오후 남편이 그것을 꺼내어 보다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한 웃음이 나를 자극함과 동시에 남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듯 빼앗고 보니 그것은 국민학교 저학년 때 통지표였다.
‘몸에 부스럼이 많음.’
가정 통신란에 담임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 남편을 그렇게 웃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뭐 이런 것까지 싸 보내고 그래."
창피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괜시리 엄마만 타박을 했다. 너무나 정직하게 써 보내신 선생님의 글로 인해 잠시 유년의 소소한 기억들이 스쳤다. 지금도 여전히 민감한 피부를 가졌지만 그때 난 계절이 바뀔 때나 음식 특히 고등어나 딸기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심하게 나곤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매년 2~3차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팔 다리는 늘 가려워 긁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마 아토피가 아니었나 싶다. 자라면서 청년이 되어서도 늘 피부 트러블이 있었지만 다행인지 그다지 외모에는 민감하지 않은 터라 그저 지나가곤 했다.
얼마 전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해가 지날수록 건물은 낡아 가지만 주위의 조경들은 풍성해지고 안정적으로 변해 가는 그런 곳.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제법 큰 단지인데, 아침엔 여기저기에서 무리 지어 태극권이나 각종 춤들을 추는 모습들이 보이고 단지 안 작은 연못엔 길함을 뜻한다는 흑조 가족과 여러 모양새의 오리들이 헤엄치고 정자에는 노인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한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모래장난을 하며 뛰어 놀고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들이 어찌나 정겨운지 이렇게 남녀노소가 같은 공간에 어우러져 있으니 정말 미소가 절로 나오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이곳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얼굴과 목 언저리가 가렵기 시작 하더니 불긋불긋 피부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도 청춘인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스칠 때 마침 밖에 하얀 눈처럼 무엇인가 가 날라 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곳곳에 심겨져 있는 버드나무 꽃가루가 엄청나게 날려 거리 구석구석 쌓여 있는 것은 물론 열린 창으로 집안에 까지 들어와 날아 다니고 있었다.
'아, 원인은 저 녀석 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수년 전 우리나라도 봄철 피부 트러블의 원인이 꽃가루고 버드나무에서 특히 많아 그 많던 수양버들을 베었던 기억이 있다.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 꽃 가마 타고 가네~"
노래처럼 낭만의 상징이 순간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현실이 서글프고 인간의 마음이 간사 하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곳곳에 적지 않게 심겨져 있는 저 나무들을 이곳 사람들도 베어내게 될까? 과연 많은 이들의 아토피나 피부 트러블의 원인이 저 나무일까? 인간의 이기심이 편리함을 주었지만 잃은 것도 많고 어떤 일이든 얻기 위해선 동시에 잃는 것이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모든 관계는 전쟁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연과의 전쟁, 나와의 전쟁. 하지만 자연과의 전쟁은 이길 수 없음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을 거역하고 살수 없고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나의 발등을 찍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전쟁은 나의 의지와 끊임없이 치러야 한다. 오늘도 너랑이 아닌 나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난 이기고 싶다.
칭푸아줌마(pbd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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