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중국은 다양한 사상들을 기반으로 크고 작은 발전을 이루어 왔다. 유교의 기틀을 마련한 공자부터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까지, 과연 어떤 사상가들이 중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는지 알아보자.
도덕과 예의 ‘공자(孔子)’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유가 사상을 체계화하고 중국 최초의 경서 ‘논어’를 집필한 공자는 기원전 551년 산동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제나라, 노나라 등의 국가에서 활동했다. 그는 도덕과 예의가 어우러진 사상을 주장했다. 효제(孝弟)를 통해 인(仁, 어진 삶)을 실천하고 전통적, 관습적 규범을 중시하는 예(礼)를 따르면 인덕(仁德, 어진 성품)을 갖출 수 있고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이후 중국과 한국이 엄격한 율격을 가진 국가로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에도 전통과 예절을 중시하는 문화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더없이 익숙하다.
공자(孔子)
성악설과 예치국가 ‘순자(孙子)’
순자는 공자가 죽고 약 200년 후인 기원전 298년에 태어났고,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활동했다. 당시 7개 국가가 중국을 통일시키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다. 순자는 조나라의 유학자로 활동하며 중국의 통일을 위해 힘쓰는 한편 공자가 확립시킨 유가 사상을 연구하며 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성악설(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악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인간은 본래 악한 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을 수양해야만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예의로 질서를 확립하는 ‘예치(礼治)국가’를 건국할 것을 주장했다. 순자의 사상은 이후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을 통해 계승됐고, 한비자(韩非子) 등 수많은 제자들도 순자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순자(孙子)
정치제도 개혁 ‘캉유웨이(康有为)’
캉유웨이는 1858년 광동성(广东省)에서 태어났다. 캉유웨이는 서양의 제도 중 우수한 것을 받아들여 청의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변법론’을 주장했다. 1898년 광서제(光緖帝)가 변법추진을 선언하자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을 본격적으로 주도하게 됐다. 무술년에 일어나 무술변법으로도 불리는 변법자강운동은 광서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입헌 군주제 도입, 과거제 개혁 등 100여 가지 개혁안들을 추진했으나, 서태후(西太后) 등 당시 수구파의 반발로 103일 만에 실패하게 됐다. 비록 실패했지만, 변법자강운동은 서양 기술 도입과 중국 정치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캉유웨이(康有为)
민족․민권․민생 삼민주의 ‘쑨원(孙文)’
1866년 광동성에서 태어난 쑨원은 청년 시절을 홍콩에서 보내며 자연스레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됐다. 의사 면허까지 취득했지만 의학보다 정치에 더 관심을 보였던 그는 청을 개혁하기 위해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했고, 민족주의(民族主意), 민권주의(民权主意), 민생주의(民生主意)의 삼민주의를 제창하며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주도했다. 1911년 본격화된 신해혁명은 청 황제 퇴위와 중화민국 성립으로 이어졌고, 쑨원은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됐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군벌과 혁명파 간 갈등, 국민당과 공산당 간 갈등으로 인해 국가적 혼란을 겪었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이 수립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됐다.
쑨원(孙文)
학생기자 조민서(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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