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커 감에 따라 그 때 그 때 책을 정리하게 된다. 책꽂이 한 귀퉁이에 내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계림문고판 루팡 시리즈, 솔로몬의 보물, 15소년 표류기, 몽테크리스토퍼 백작, 철가면 등이 눈에 띈다. 큰아이가 4학년 때 중고 사이트에 나온 책이 너무도 반가워 어렸을 때 시골에 살던 나를 살찌워 준 책들이라 구매했었다. 요즘 책들이 너무 좋아 책 좋아하는 큰아이도 한 번 읽고 만 듯하다. 책이 귀한 시골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정말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그림 하나 없는 이 책들을 버릴 수가 없다. 흥분으로 책을 빌리고 읽고 돌려주던 나의 어린 시절이 빛 바랜 책에 묻어 있는 듯 하여.
4개 초등학교가 모여 하나의 중학이 되는 면소재지 중학교에 다녔음에도 변변한 도서관 하나 없었다. 50년 넘은 역사의 초등학교엔 시골학교 치고는 꽤 많은 도서들이 있어서 책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중학교에 들어와 책을 빌릴 곳이 없었다. 다행히도 읍내 외갓집에 가면 외삼촌, 이모가 없는 살림에도 꽤 두꺼운 고전 헌책들을 벽 가득 채웠음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시절엔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는 이모가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를 전후 해서 그 당시 우리를 위해서는 유일한 소포로 책을 10권씩 보내주곤 했다. 이모가 보내 준 책들은 외울 정도로 50번 이상씩 읽을 만큼 책이 귀했다. 어린이를 넘어서니 책도 끊겼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꼭 하고픈 것이 고전읽기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외갓집에 들를 때마다 몇 백 페이지 되어 보이는 그림 하나 없이 글씨만 빼곡한 책을 보면 숨이 턱 막혔다. 현재는 국어선생님인 언니가 오고 가며 책 삼매경에 빠져 있는 걸 보면서 나도 중학생만 되면 꼭 도전하리라. 하지만 뭐부터 읽을까? 막상 닥치고 보니 앞이 캄캄했다. 이름이 멋있어 보여 헤르만헤세 책들 앞에 멈춰서 ‘수레바퀴 밑에서’를 집어 들었는데 첫 페이지를 읽고 닫았다. 그렇게 고른 나의 첫 번째 고전은 펄벅의 ‘대지’다. 아버지께 드릴 차를 준비하는 왕릉의 아침 일과로 시작하는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빨려들 듯 족히 400페이지 되는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모파상 전집, 폭풍의 언덕, 전쟁과 평화를 거쳐 고3 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까지 고전 읽기는 계속되었다.
극장에 가서 처음 본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교사셨던 아버지가 언니와 나를 시내 극장에 데리고 가셔서 첫 번째 영화로 보여 주셨다. 이미 책으로 읽었기에 잔뜩 기대했었는데 그 수작이 왜 내겐 그렇게 밋밋하게 다가왔는지. 책이 주는 맛을 다 담아내지 못함에 아쉬워했다. 반면 영화가 너무 좋아 책을 읽은 경우도 있었는데 ‘닥터 지바고’이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작품들은 여고 마지막 시절에 접했는데 여느 작품과는 다른 흡인력과 매력에 빠져 들었다. 대입이 코앞이라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나의 학창시절 고전읽기도 끝났다.
지난 가을엔 ‘제인에어’를 다시 읽었다. 50을 바라보며 다시 읽은 제인에어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여고시절 때도 이 책을 사랑했다. 작가의 시야가 여전히 나의 삶의 시야와 맞닿은 부분이 있어서임을 본다. 폭풍의 언덕을 함께 읽으며 브론테 자매의 이른 죽음을 혼자 안타까워하던 때가 있었다. 책을 통해 시공을 초월해 그들과 대화하며 교감해 본다. 나는 나이가 들었는데 책 속의 그들은 여고생이 봤던 모습 그대로 생생하다. 여전히 내 맘속에 작가들과 함께 살아 있다.
Renny(renny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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