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에 탄압과 수탈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일제에 대항해 무력투쟁을 한 많은 단체들이 만주에 근거지를 두었다. 또한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한 임시정부도 상하이에 수립됐다.
사실, 당시 중국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청나라는 열강들에 의해 침탈 당하고 있었으며, 청나라가 무너진 후에도 여러 군벌들이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은 1932년 3월 2일 만주국을 세운 뒤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본격적으로 집어 삼키려 했다.
중국인들은 일제의 침략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일제의 침략행위에 맞서 싸웠다. 소개할 사람들은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바로 세우고 침략자들을 물리친 중국인 3명이다.
쑨원(孙文, Sūn Wén)
1911년 10월 10일 동맹회가 ‘우창봉기’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시작됐다. 1912년 2월 12일 신해혁명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쑨원은 위안스카이에 대항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병사한 후 중국으로 돌아온 쑨원은 중국 남부의 군벌들을 통합해 ‘진정한 중화민국’을 세우려 했지만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쑨원은 1922년 6월, 군벌에 의해 광저우에서 쫓겨나게 된다. 쑨원의 국민당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기반을 다지게 됐으며, 제 1차 국공합작을 진행하는 계기가 됐다.
쑨원은 1925년 3월 1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민주 공화국을 만드려던 쑨원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주더(朱德, Zhū Dé)
주더(朱德)는 1886년 12월 11일 쓰촨성(西川省) 난충의 이룽현(仪陇县)에서 태어났다. 청년때 주더는 ‘원난강무당’이라는 군사학교에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신해혁명과 호국전쟁에 참가하며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호국전쟁이 끝난 후 그는 농민들의 참혹한 생활을 목격하고 상하이로 가 공산주의를 공부했다. 이후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뒤 중국으로 돌아와 1차 국공합작 당시 국민당군을 지휘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일어난 국공 내전 때 마오쩌뚱의 공산당에 가담하게 됐다. 1937년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국민 혁명군 제8로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 항일전선의 선봉에 서서 일본군과 전투했다. ‘백단대전’에서 일본군 2만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사실 팔로군은 한국의 독립군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조선 의용대는 중국의 팔로군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수행했다.
마잔산(马占山, Mǎ Zhàn Shān)
11월 4일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철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응전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후퇴했다. 이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려 하자 마잔산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다. 일본은 마잔산을 만주국으로 망명시키기 위해 대량을 금괴를 제공하였고 마잔산은 만주국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마잔산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으며 마잔산은 모든 문제와 그에 따른 조치들을 모두 일본 관료에게 보고해야 했다. 결국 마잔산은 만주국을 빠져나와 일제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버리다 소련으로 도주한다.
중국으로 돌아온 마잔산은 1936년 시안사변 이후 동북전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팔로군과 함께 일제에 대항하여 싸웠다. 1938년 하순 마잔산이 옌안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은 “8년전 홍군과 마잔산은 항일 동지가 됐으며, 반 백살이 넘는 나이에도 항일 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모습은 탄복할 만하다”라며 극찬했다.
이후 마잔산은 병으로 베이징에서 생활하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해 달라는 마오쩌둥의 제안에도 응하지 못하고 1950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학생기자 유지민(상해한국학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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