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5개월 된 딸과 상하이에 처음 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얘기다. 그 시절 나는 술을 마시고 저녁에 상하이를 돌아다니면 다음 날 장기가 사라진 채 발견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술을 한 잔 걸치시고, 아파트단지 내에서 집을 못 찾아 헤매고 있다고 전화를 했다. 나는 행여나 남편이 어떻게 될까봐 베란다 난간을 붙잡고 아파트단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새댁이었다.
예방접종을 하러 보건소에 갔다. 그런데 한 아기는 기저귀 대신 천을 감고, 옷도 없이 두꺼운 아기 이불을 덮고 있었다. 아기 띠나 유모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기용품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 시절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려면 한국병원은 진료비, 약값이 너무 비쌌다. 한번은 의사 선생님이 X레이를 두 장 찍으라 해서 진료비가 1000위안이 넘게 나오는 바람에 병원에서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 뒤로 할 수 없이 중국 로컬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접수를 하고 한두 시간을 기다려 진찰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어떤 남자와 아이가 슬라이딩하여 새치기로 진료실에 먼저 들어가 버렸다. 뒤에서 레이저빔을 쏘아대거나 말거나 너무도 당당했다. 나는 그의 뻔뻔함에 개탄했지만, 그런 생활방식이 너무 익숙한 그들은 일말의 미안한 눈빛조차 주지 않았다.
어렵사리 진료를 마치고 아래층에 가서 링거액과 약값을 내고 올라와서 다시 접수증을 내밀면 또다시 한 두 시간 동안 링거 맞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애 간병하고 아침에 일찍 나오느라 대충 때운 뱃속이 밥시계를 알린 지 오래다. 이미 열이 나는 아이와 나는 지쳐있었다. 언제 링거 순서가 오고, 언제 다 맞고 집에는 언제 갈 수 있는 걸까?
링거를 맞는 침대 밑에는 용변을 덮은 휴지도 있고, 구석에 있는 고무쓰레기통에는 링거를 맞다가 아이의 쉬를 누이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은 쓰나미가 되어 뒤죽박죽 됐고, 코끝으로 느껴지는 생화학 공격에 기분은 처참했다.
침대방만으로는 링거를 맞은 어린이 수요를 당해낼 수가 없기에 링거를 꽂는 의자가 주욱 마련돼 있었다. 아이를 안고 앉아서 몇 시간 링거를 맞히려면 이 또한 체력과 싸움이었다. 배가 고프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떠드시고, 볼이 빨간 아이들은 울어댔다. 이것이 소아과의 진풍경이었다. 그런 기다림과 절차에 이미 익숙한 중국 사람들은 아이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이 한 명당 2인조 혹은 3인조로 찰떡 같은 팀플레이를 자랑했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한국의 쾌적하고 신속한 소아과가 간절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7~8시간의 사투를 보내고, 먹어도 안 먹어도 효과를 모르겠는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면 보호자가 더 병이 날 판이었다.
그 후에 둘째가 태어났고 둘째는 첫째보다 병원 출입이 더 잦았다. 다행히도 둘째가 서너 살 때 여행자보험을 들어 실비가 보장된 이후로는 마음 놓고 한국병원에 다닐 수 있어 감사했다. 둘째가 한참 보건소에서 예방접종을 다닐 무렵인 2009~2010년도에 아기들은 때깔도 고운 때때옷을 입고 유모차를 타고 행차했다. 상하이의 경제성장이 서민경제에까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상하이에서 아이들 커가는 낙으로 뚜벅뚜벅 거북이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이렇다 할 비전 없이 맨몸으로 살아낸다. 어쩌면 무모하게 어쩌면 용감하게 말이다.
여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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