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이른 아침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남편이 방에서 다급히 전화를 받으며 아버님께서 임종하셨다고 어서 준비하라고 한다. 마침 학교들이 방학을 하고 구정이 가까운 시기라 비싼 건 차치하고 비즈니스라도 좌석이 있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기숙사에 있는 큰 아들을 불러 급히 한국 아버님을 모신 병원으로 갔다.
이미 어머님과 다른 가족들과 작은 아들이 조문객을 맞고 있었고 우리도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영정 사진 속 아버님을 뵈니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나에게 그리움을 복받치게 했다.
매일 아침이면 가까운 산을 오르시고 술과 친구를 좋아 하셨던 아버님.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귤 한 박스를 사 들고 오셔서 어머님께 주셨다던 그 귤은 장례를 마치고 며칠을 함께 먹었고 마지막 한 개는 아버님 마지막 선물이라며 어머님 입에 넣어드렸다.
60년을 함께하신 두분 살면서 여러 가지 희노애락이 있으셨겠지만 건강히 사시다 밤새 주무시다 우리 곁을 떠나가신 아버님이 복이 많으시다고 어머님은 이별의 서운함을 그리 표현 하셨다.
우리가 한국으로 올 때 코로나 바이러스 소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나라에서 한 지역의 소식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듣고 지나쳤다. 아버님 장례를 마치고 갑자기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2주후에야 병원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디에서나 열을 재고 마스크를 쓰고 여러 가지 방역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온 우리는 더 조심스러웠지만 예상치 못한 전염병으로 비행기 티켓은 결항이 됐고 수차례 취소와 결항이 반복되다 결국은 3월말까지 결항이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 온지 한달. 예상대로 라면 벌써 2주전에 상하이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자꾸 연장 됐고 모든 것은 해석이라고 어머니께서는 아버님께서 이 시기를 피하게 너희들을 불러내신 것 같다 말씀하셨다. 그 동안 한겨울인 것을 잊은 듯 따뜻한 날씨가 계속 되었는데 눈이 펑펑 내렸다. 일기예보는 다음날도 이렇게 내린다지만 입춘을 지난 추위는 봄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듯 했다.
그렇게 며칠, "신천지가 큰 거 하나 터뜨렸어요" 작은 아들이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온갖 매스컴에서 사이비 집단에 대해 열을 올리고 한국의 확진자가 갑자기 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구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상황을 역전시킨 듯 이제 돌아가려니 무성한 소문과 격앙된 언어들로 두렵기도 하고 위축 되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한달 반 만에 다른 항공사로 연결돼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순조롭게 공항에서 모든 심사를 통과했다. 우리 집 단지 주민 위원회 에서는 해당자들(중국인 외국인 차별 없이)이 2주동안 불편없이 자가격리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많은 도움(장봐주기, 택배전달, 쓰레기수거 등)을 주었고 우리도 당연히 모두의 안전을 위해 협조하고 있다.
옛말에 '서울에 안 가본 사람이 말싸움 하면 이긴다' 라는 말이 있다. 세상이 하 어수선하니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때론 기자는 사실만을 써야 하는데 자기의 의견을 써 민심을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면서 모두가 조심하고 배려하면서 확인되지 않은 말에 우왕좌왕 하기보다는 냉정하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규칙을 잘 지키면서 차분히 이시기가 잘 지나가길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칭푸아줌마(pbd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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