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다 모여 식사를 하던 어느 날 저녁, 두 딸아이의 눈에 아빠의 흰머리가 눈에 띄였나보다. 사실 나도 최근 들어 남편의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아이들이 아빠도 이제 흰머리 커버 염색을 할 때가 되었다며, 나를 보더니 엄마가 아빠 머리 염색 좀 해주란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 눈에는 나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흰머리가 멋있고 당당하게 보였다. 게다가 염색을 한 번 시작하게 되면 계속하게 되면서 꽤 성가신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마 라인에 따라 자라는 흰머리를 틈틈이 염색해 부지런히 감추고 있지만 말이다.
“염색하지 마. 나는 남자들이 나이 들어서 머리를 새까맣게 염색한 것보다는 흰머리가 자연스럽고 멋있어 보이더라.”
무심결에 내뱉은 이 말로 나는 아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엄마, 지금 성차별적인 발언한 거 알아요?”
“아빠는 지금 엄마한테 성차별을 당한 거라고요.”
엄마는 염색하면서 왜 남자인 아빠는 하지 말라고 하느냐며, 아빠도 염색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거라고, 엄마가 말하던 젠더 의식은 어디 갔냐며 아이들은 야무지게 따졌다. 나는 멋쩍었고 남편은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비슷한 일은 전에도 있었다. 한 인디밴드 공연 영상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또 화근이 되었다.
"어머, 남자인데 이렇게 큰 귀걸이를 했네!”
이 말을 했다가 큰 아이에게 된통 혼이 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설마 남자는 큰 귀걸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냐며.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면서도 이론과 실천이 따로 노는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제부는 스킨케어 제품을 꼼꼼히 챙겨 바른다. 피부 잡티 커버용 크림이나 자외선 차단제도 늘 바른다. 신기하면서도 이게 세대 차이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제부가 눈썹 문신을 하고 나타났을 때에는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여자인 나보다 더 외모에 신경 쓰고 가꾸는 남자는 그 동안 내 주변에서는 없던 캐릭터였다. 세상의 한 편에서는 여성의 상품화와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반대로 탈코르셋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가족 중 '꾸미는 남자'의 등장은 좀 당혹스럽기도 했다.
아이돌 출신의 한 남자 가수가 하이힐을 좋아해 굽이 10센티 되는 킬힐을 신고 산책을 하는 것은 연예인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왕홍 중 한 명인 리자치(李佳琦)는 '타오바오 립스틱 오빠'란 별명을 갖고 있고, 뷰티 관련 콘텐츠를 가장 많이 만들고 있다.
누군가 나의 몸과 외모를 평가하고 꾸밈노동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 때마다 불편했다. 여성에게 꾸미지 않을 자유가 있듯이 남성에게도 꾸밀 수 있는 자유가 있을 것이다. 이미 남성 전용 뷰티 시장도 꽤 커졌고, 젠더리스 제품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과열되어 또 다른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남편의 흰머리 커버 염색도 결국 본인의 자유이다. 남편의 선택을 물었더니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안 하고 싶어. 나중에 지금보다 흰머리가 많아지면 그때는 할래…. 그때 노란색으로 한 번 해볼까?”
아이들은 환호했다. 식사시간은 나중에 아빠가 어떤 색깔로 염색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로 활기를 띄었다. 우리의 상상 속 몇 년 후 남편과 아빠의 머리는 무지개 색깔이 돼있었다.
레몬버베나(littlepool@hanmail.net)
<아줌마 이야기> 코너가 올해부터 <허스토리 in 상하이>로 바뀌었습니다. 다섯 명의 필진들이 상하이 살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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