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생겼다. 시골 슈퍼 사장. 좀 더 욕심 내어 가맥(가게 맥주)을 할 수 있는 슈퍼와 그 옆에 작은 책방까지 겸할 수 있었으면 더없이 좋겠다.
최근 종영이 된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은 하릴없이 마음만 바빴던 올해 봄, 나를 달래주던 힐링 프로그램이었다. 별 내용은 없었다. 별 것 없다고 하기엔 조인성이 끓여주는 홍게 라면이 있었고, 동네 주민으로 착각할 정도로 친근한 차태현이 있었지만 그 존재감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곧 묻혀졌다. 예능 프로그램이라기 보다는 다큐에 가까웠다. 출연자들조차 어떻게 방송이 될 지 걱정할 정도로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었고, 매 회마다 바뀌는 연예인 알바생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
그런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슈퍼를 찾아오는 동네 손님들을 맞고, 점심 장사와 저녁 장사로 라면을 끓이고 달걀을 마는 모습을 넋 놓고 봤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슬슬 모이는 마을 분들의 편안한 표정과 정감 있는 대화를 엿보면서 내 마음의 허기도 달랬다. 별 약속도 없이 지나다 들러 소주 한 잔이든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하루의 피로와 매듭을 풀 수 있는 그 시간과 공간과 이웃이 부러웠다. 간이 의자와 막걸리 잔 하나 들고 가서 슬쩍 낄 수만 있다면.
강원도의 쨍한 차갑고 맑은 공기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보고만 있어도 그 곳의 공기가 내 폐를 통과하는 느낌이었고, 일상에서 끙끙 앓던 것들이 먼지처럼 날아갔다. 소복이 쌓인 눈과 강원도의 산과 차태현이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던 마을의 정취는 아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한국에 대한 향수도 달래주었다.
어느 순간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도 슈퍼 사장을 해보면 어떨까. 기왕이면 시골정취 물씬 남아있는 곳에서. 테이블도 두 개정도 놓고 간단하게 술 한잔도 할 수 있고, 그 옆 공간에는 원래부터 갖고 있던 꿈인 작은 동네 책방도 겸하면서. 책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책모임도 해볼까. 인테리어는 모던한 분위기가 좋을까, 요즘 대세인 레트로가 좋을까.
슈퍼는커녕 다른 장사도 한번도 안 해본 나는 겁도 없이 자꾸 꿈만 키웠다. 장소는 아무래도 조금은 익숙한 곳이 낫지 않을까. 어릴 적 잠시 머물렀던 정읍이나 상주는 어떨까. 귀농한 후배가 살고 있는 홍성도 괜찮을까. 슈퍼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책으로도 만들어 볼까. 언제 어떻게 구현될지는 모르겠지만 상상만하고 있어도 설렜다. 매우 달콤한 꿈이었다.
남편의 첫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삼일 일하고 힘들다고 안 한다고 하지 마라.”
다른 지인들의 반응도 시원찮은 건 마찬가지였다. 슈퍼와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육체노동을 각오해야 하는지, 슈퍼는 그렇다 쳐도 책방의 손님이 얼마나 될 것인지, 결정적으로 외지인이 시골에 정착해서 사는 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네에서 내놓은 왕따가 되기 십상이라는 아찔한 말도 들었다. 내 슈퍼에 투자를 하겠다는 친구가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지인들의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늘 즐거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쩌나. 그야말로 어쩌다 보게 되었고, 그 어쩌다에 꽂혀버린 걸. 인생은 ‘어쩌다’이고, 꿈은 내 편일 것이다.
레몬버베나(littlepool@hanmail.net)
<아줌마 이야기> 코너가 올해부터 <허스토리 in 상하이>로 바뀌었습니다. 다섯 명의 필진들이 상하이 살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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