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4년의 시간을 거쳐 열리는 국제적 규모의 축제이다 보니 크고 작은 이유로 논란이 된 바 있다. 그 중 가장 중대한 문제를 초래한 올림픽 중 하나가 바로 1972년의 독일 뮌헨 올림픽이다. 올림픽 기간 중 일어난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이 발생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을 적대하며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추구하는 팔레스타인인 극단주의자 조직 ‘검은 9월단’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하고자 올림픽에 참여한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았다.
뮌헨 올림픽에서 일어났던 참사의 발생과는 다양한 요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우선, 당시 올림픽의 보안은 매우 허술했다. 1972년은 군국주의적이고 독재적인 나치 독일의 해산 이후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따라서 서독 정부는 보다 평화적이고 즐거운 분위기의 올림픽을 만들어내어 독일의 변화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한 분위기 조성의 일환으로, 정부는 비무장 상태의 경비들로 하여금 올림픽의 진행 지역들을 지키게 했다. 따라서 테러를 진압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춘 군사나 경찰들은 근처에 없었고, 이러한 보안 허점은 검은 9월단의 일원들에게 손쉽게 진입할 기회를 만들어줬다.
이스라엘이 올림픽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 역시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에 불을 지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건국되자 유대인들은 마침내 스스로를 위한 독자적인 국가가 생긴 것을 축하했지만, 이스라엘 지역에서 살다가 건국과 함께 잔인하게 추방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 후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심화됐다. 검은 9월단을 비롯한 각종 극단주의 세력들 역시 양쪽에서 나타났다. 1972년에 올림픽에 참여했을 때 이스라엘 측은 11명에 달하는 선수들을 참여시켰고, 검은 9월단은 이러한 대규모 참여를 보며 뮌헨 올림픽이 습격을 감행하기에 최고의 시점이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검은 9월단은 올림픽의 보안 허점을 틈타 9월 5일 새벽 4시, 올림픽 선수촌에 있는 이스라엘 선수들의 숙소에 잠입했다. 잠입 직후 두 명의 선수들이 살해됐고, 남은 9명은 인질로 잡히게 됐다. 이들은 인질들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에 잡혀 있는 200여명의 팔레스타인인 포로들, 서독에 구금된 2명의 독일인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소식을 접한 후 석방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 공표했다. 한편 서독 정부는 제대로 된 대테러 부대를 준비하지 못한 탓에 테러를 진압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경찰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경찰 측은 위장 경찰들을 선수촌에 잠입시켜 인질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시도했지만, 잠입 과정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생중계된 탓에 얼마 안 가 들통나게 됐다. 검은 9월단과 경찰들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8명의 테러리스트들 모두가 사살되거나 생포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하지만 9명의 인질들 역시 전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비록 대참사로 이어진 올림픽이었지만, 뮌헨 올림픽이 남긴 긍정적인 영향 역시 확실히 존재한다. 해당 올림픽 이후로 올림픽의 보안에 관한 문제가 대두됐다. 1972년 이후로 열리는 모든 올림픽들은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쓰게 됐다.
참사 이후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됐다는 점은 사실이다. 뮌헨 참사가 양측의 충돌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데에 일조했다는 주장 역시 타당하다. 뮌헨 올림픽은 여전히 올림픽 역사상 논란이 됐던 올림픽 중 하나로 남게 됐다.
학생기자 윤재인(상해중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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